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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 Sep 27. 2020

무심코 그린 얼굴

여의도에서 길을 걷다 보면 아는 이들과 종종 마주친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부터 자주 는 사람까지 스펙트럼은 다양한데, 보통 각자 볼 일이 있는 눈인사나 간단한 안부 정도 교환하고 가던 길을 간다.


요즘 부쩍 내가 아는 상대방이 나와 눈이 마주쳐도 몰라보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한참 동안 해오던 염색을 그만두고 머리를 볶아서 꼬불꼬불 반백의 머리에 마스크까지 쓰고 다니니, 얼굴 윗부분부터 머리까지 모습만 가지고는 잘 몰라보는 것도 당연하다. 


길에서 눈인사를 보내면 가끔 상대방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본다. 순간 '저 사람은 누군데 아는 척 하지?'라는 표정이었다가 내가 마스크를 벗으면 그제야 다행스러운 표정이 된다.(그래도 라보는 이도 있다. 그러면 내가 더 당황스럽) 가끔은 길에서 마주치더라도 다른 이들이 잘 몰라보는 게 오히려 마음 편할 때도 있다.

복면가왕, MBC TV

얼굴은 사람을 개별적 존재로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얼굴 외에는 구별할 수 있는 시각 정보가 무척 제한된다. 그래서, 뉴스의 모자이크는 얼굴을 가리고, 복면 쓰고 노래하는 이를 맞추는 프로가 인기를 누리며 흉악범의 얼굴을 공개하라는 청원이 빗발치기도 한다. 주민증이나 여권, 이력서 등에 넣는 '증명' 사진은 얼굴을 정면으로 찍어 그게 누구인지 증명한다.


눈과 입이 있는 얼굴을 가지는 동물은 생각보다 많지 않아서 곤충과 같은 절지류 일부와 척추동물뿐이라고 한다. 그중에서도 사람만 유독 독특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열매 같은 먹이를 입체적으로 잘 보기 위해서 눈 사이가 가까워졌고, 손을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긴 주둥이가 사라졌으며. 뇌가 발달하니 이마가 훤하게 넓어졌다.


직립보행을 하고 서로 협력하며 모여 살게 되니 얼굴을 통한 식별력이 더 중요해져 얼굴에 미세한 근육이 발달하고 털이 점차 사라졌다. 다른 동물보다 눈의 흰자위도 커져서 상대의 표정과 시선을 서로 읽으며 의사소통을 하기 쉽도록 얼굴이 발달하였다.   

진화의 덕택으로 사람은 좋은 시력과 개성 있는 얼굴과 발달된 기억력을 동시에 갖게 되었다. 그 덕에 추억 속 가만히 떠오르는 그리운 시절 얼굴은 문득 마음을 뜨겁게 만든다. 옛날엔 사진 찍으려면 보통 얼굴을 정면으로 향하고, 카메라 앞에선 일단 어찌 되었건 꼭 웃어야 했다. 귀한 필름을 함부로 낭비할 수 없었다. 그 때문일까? 옛날을 떠올려보면 웃고 있는 얼굴에 대한 추억이 더 많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이라는 노래처럼 기억 속에 숨어있다가 갑자기 나타나는 얼굴이 있다. 혹시  얼굴은 다른 이의 기억에 어떻게 담겨 있다 무심코 그려질까. 내가 태어나 눈 뜨고 처음 바라본 얼굴은 누구의 얼굴이었고, 마지막 눈 감을 때 나를 바라보는 얼굴은 또 누구의 얼굴일까.


부디 그 얼굴은 내가 사랑하는 이의 얼굴이길, 그때는 마지막으로 카메라 앞처럼 밝은 표정으로 웃으며 인사할 수 있길. 얼굴이 그들의 좋은 기억에 남아 무심코 그려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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