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수만 있으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동료로부터 도르테아 윌리엄스의 쿼텟 오디션 추천 전화를 받았을 때, 조 가드너는 이 대답이 바로 현실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재즈를 향한 오랜 꿈이 실현되는 흥분의 순간, 발밑의 맨홀을 살피지 못한 그는 당장 저세상에 도착했다. 그런데 여한이 남았다. 아직 못한 첫 연주가 그날 저녁이었다.그때부터 시작되는 그의 현생 컴백 스토리가 영화 '소울(Soul)'이다.
알고 보면 그가 살피지 못한 곳은 발밑뿐이 아니었다. 삶의 유일한 목적이라며 재즈를 좇는 동안 그의 주위에 있는 것들, 이를테면 홀어머니의 사랑, 단골 미용사 친구의 꿈, 막대 사탕의 달콤함이나 피자 조각과 베이글의 감칠맛, 단풍 열매에 어룽대는 햇볕 역시 살피지 못했다. 그는 엉겁결에 도착한 '태어나기 전 세상'에서출생 거부의 아이콘 '22' 영혼과 만나, 삶의 기쁨은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을 느끼고 즐기는 데 있음을 깨달아 간다.
"먹을 수 있으니 좋구나."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이 생사를 건 전투 후, 따뜻한 토란을 입에 넣으며 한 말이다. 살아있음의 행복은 오감의 감각에서 비롯된다. 태어나기 전이라서 아픔이나 배고픔에 무감각한 세상에 살던 '22' 영혼은 조의 몸을 빌려 피자를 맛보고, 지하철 환풍구에 누워 바람을 맞으며, 거리의 악사 연주를 듣는 경험에서 놀라운 감동을 느낀다. '22'에게는 그동안 어떤 위대한 멘토도 설명하지 못했던, 세상은 살아볼 만하다고 느끼는 불꽃의 순간이었다.
어릴 때, '장래 희망'이라는 빈칸을 채워야 할 때마다 난감했다. 딱히 뚜렷이 하고 싶은 게 없는데, 왜 희망이라는 칸을 잘 알지도 못하는 몇 개 직업 중에서 골라 채워야 했을까.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삶을 즐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써넣으면 "그래서 너는 대체 뭐가 되고 싶다는 건데?"라는 말을 들었을까? 영화 속 영혼들은 직업 체험을 통해 얻은 마음의 불꽃을 가지고 지구로 힘차게 날아가는데, 그렇게 삶을 얻어도 결국 일에 찌들고 삶과 단절되어 헤매는 신세가 된다. 희망이 직업이라면 그 삶에 기쁨이 깃들 여지는 적어지겠다. 그가 재즈 뮤지션이거나 밴드부 교사이거나 이발사나 수의사, 헤지펀드 매니저, 거리의 악사라 해도 다 괜찮다. 삶에서 발밑만 제대로 살피며 살아가기만 한다면.
"우리는 'Becoming'에 눈을 두고 살지만 정작 행복이 담겨있는 곳은 'Being'이다." 행복 심리학자 서은국 교수의 책 '행복의 기원'에 나온 문장이다. 행복은 무엇인가 성취한다 해서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행복감은 일상에서 느끼는 소소한 기쁨 안에 담겨있다. 조 가드너는 우여곡절 끝에 첫 재즈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지만, 밀려오는 허탈한 감정에 당황한다. 성공의 기쁨은 금방 사라지고, 오히려 '22'가 그의 기억에 남겨놓은 여러 감각들이 행복으로 남아 그의 아름다운 연주로 탄생한다.
화창한 주말에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여러 꽃과 나무가 가득한 정원에 안내 푯말이 있었다. 푯말에는 이름, 품종, 꽃말과 함께 개화기는 언제인지 하는 설명으로 채워져 있었다. 식물의 삶에서 꽃 피는 시절이 그렇게나 중요해서 그 빈칸을 개화시기로 채워야 했을까? 조 가드너가 다시 삶을 얻어 돌아가는 세상은 항상 꽃 피는 시절은 아니다. 실패나 실망이 반복될 수 있고, 피자나 베이글뿐 아니라 혹시 그렇게 좋던 재즈에 질릴 수도 있다. 하지만 싹을 틔우고 자라고 꽃이 피고 시들고 잎이 나오고 열매 맺고 나이테를 쌓는 모든일을 받아들여 기쁘게 느낀다면, 발밑과 주변의 무심한 변화를 더 잘 살필 수 있다면, 그의 소울은 적어도 좀 덜 외로울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