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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 May 06. 2021

해감의 시작

컵에 담긴 만년필 펜촉에서 푸른 잉크가 실처럼 풀려나와 맑은 물에 서서히 퍼지고 있었다. 페이스북에서 본 사진이다. 그 사진을 포스팅한 페친은 두 달에 한번 정도 이렇게 물에 담가 피드가 머금은 잉크를 빼준단다. 그러면 만년필이 잉크를 더 잘 삼킨다고 했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한 장면이 떠올랐다. 시한부 삶이 끝나가는 사진관 주인 정원(한석규)이 다림(심은하)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기 전, 만년필을 컵에 담가 조용히 씻고 말린다. 편지는 끝내 부치지 못한 채 다림이 보낸 편지와 함께 상자에 넣고 마지막 자신의 독사진을 찍는다. 비록 전하지는 못한 마음이지만 묵묵히 담았던 사랑을 글로 풀어놓고 그는 떠났다. 마치 만년필이 그동안 품었던 잉크를 맑은 물에 풀어내듯.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중에서 정원의 만년필

해감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꼬막이나 바지락 같은 조개를 물에 소금을 풀고 담가 어두운 곳에 놓으면 조개는 오랫동안 물고 있던 진흙을 물에 천천히 뱉어낸다. 이렇게 하는 것을 바다 해(海) 자를 넣어 해감한다고 한다. 조개에게는 망이나 비닐에 담겨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어둡고 짭짤한 고향 갯벌의 기억을 고요히 되새기는 순간이다. 축축한 뻘에서 자란 조개가 맑은 물에 진흙을 뱉어내는 느낌이 어떨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오래 담고 있던 찌꺼기를 조용히 풀어 보내는 조개의 모습은 만년필이 내부의 굳은 잉크를 물에 서서히 풀어내는 모습과 많이 닮아있다.  


오래 담겨 굳어가거나 상하고 있는 것은 잘 내보내건강함이 유지된다. 그래서 사람에게도 해감의 시간이 필요하다. 조용히 홀로 침잠의 시간을 보내거나 친한 사람과 공감하는 시간을 가질 때, 마음에 굳은 것이 녹아 나오거나 자기도 모르게  뱉어진다. 그것이 깨달음이거나 고백이거나 눈물이거나, 보여주지 않던 속마음이거나. 일단 내놓고 보아야 무엇을 담고 있었는지 알 수 있고 돌볼 수 있다.


들숨과 날숨이 합해서 호흡이 된다. 숨을 오래 참아보라고 하면 다들 일단 숨을 후욱 들이쉰다. 하나, 둘, 셋, 넷... 세어감에 따라 점점 숨이 가빠오는데 결국 푸하아하며 숨을 내쉬면서 숨 참기는 끝난다. 산소가 부족해 숨이 찬 것일 텐데 숨을 들이마시는 게 아니라 내쉬는 것만으로 속이 후련하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몸에 무엇인가 들어 보낼 때 보다 내보낼 때 더 시원함을 느끼지 않았던가.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중에서 정원의 편지지

글을 쓰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스스로 만드는 해감의 시간이다. 복잡한 마음과 몸의 피로를 글과 잠으로 풀어 내보내어 개운함을 찾는다. 서로 같이 만드는 해감의 시간에는 만년필과 조개나 마찬가지로 맑은 물에 담그는 상황이 필요하다. 능숙한 말로는 맑은 물을 만들지 못한다. 혹시 말을 하다가 아, 내가 너무 옳은 말을 적절히 하고 있네 하며 스스로 도취될 때는 말을 끊고 고요함을 찾는다. 말을 신중히 고르고 천천히 가라앉힌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맑은 물로 고요히 다가가겠다는 생각. 그게 해감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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