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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 Jun 07. 2021

시속 30킬로미터와 초속 5센티미터

동네 학교 앞 도로시속 30킬로미터 제한 표지가 생겼다. 전부터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단속 카메라를 달면서 확실한 존재감이 생겼다. 달리던 차들이 카메라에 눈 마주치고 퍼뜩 놀라 설설 기어 다닌다. 사실 시속 30킬로미터면 100미터를 12초에 뛰는 속도니까, 운전자들 대부분은 그렇게 빨리 뛰어본 적도 없을 텐데도 마치 걷는 속도로 느낀다. 다들 그동안 빨리 달리는 속도에 익숙해져 있어 그렇다.


수는 있지만 다른 이를 위해 자제하는 의 멋짐에 대해 생각한다. 빠르게 달릴 수 있지만 상대의 안전을 위해 속도를 늦추는 일, 앞 차에 붙여갈 수도 있지만 옆 차선에서 들어오는 차를 위해 공간을 만들어주는 일,  몫을 조금 덜 챙겨 그마저도 없는 다른 이에 양보하는 일, 온라인보다 좀 비싸도 기꺼이 오프라인 매장에서 사는 일 같은 것. 가진 힘과 정보를 최대한 활용하여 바닥을 긁어최선을 다해 잘했다고 평가받는 세상에서, 감을 다 따지 않고 까치밥을 남겨놓는  같은 여유나 배려가 삶을 멋지게 만든다.

올림픽공원의 감나무와 까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라는 소설이 있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 약체팀인 삼미 슈퍼스타즈 팬클럽을 자칭한 사회인 야구팀 이야기이다. 야구는 선수들 사이 치열한 수싸움이 부딪히는 경기다. 투수는 타자가 예상치 못한 방향과 속도의 공을 던지려고, 타자는 투수가 던질 코스와 구질을 최대한 맞추려고, 수비수들은 타자의 공이 주로 향하는 길목을 지키려고 하며 상대를 괴롭힌다. 그런데 오히려 소설 속 삼미 슈퍼스타즈 팬클럽 야구팀의 모토는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라는 말이다. 외야 멀리 날아간 공을 잡으러가다가도 주변에 피어난 꽃향기를 맡는 외야수가 있는 팀. 칠 수 있는 공만 치고 잡을 수 있는 공만 잡는, 이기기 위한 야구보다 정신 수양의 야구로 승리를 위한 치열함을 내려놓은 야구팀 이야기가 삶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사진: Yes24)

삶의 타석에  세상이라는 투수는 종종 변화무쌍한 공을 던져온다. 이제 제법 오랜 시간 공을 봐왔으니 투구 패턴이 대충 눈에 익기는 했는데도 예상치 못한 공이  들어온다. 똑바로 오다가 갑자기 떨어지며, 몸 쪽으로 오려나 하면 바깥쪽, 변화구가 들어오나 하면 빠른 직구가 들어오니 어이쿠 당황스럽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잘 칠 확률이 높으면 좋겠지만 잘못 쳐도 뭐 괜찮다. 삶이라는 경기장은 승패가 있는 곳이 아니라서, 그리고 경기는 계속 있으니까 다음에 잘 치면 된다. 어차피 지금까지도 헛스윙 투성이에 빗맞은 공 작렬이어도 그럭저럭 살아왔다. 세상은 꼭 스트라이크만 던지지 않는다. 공이 어려우면 지 말고 그냥 지켜보는 것도 좋고, 그냥 폼나게 스윙 해보는 것도 괜찮다. 투수는  상대편이 아니라서 내가 포수로서 사인을 보낼 수도 있다. 직구. 시속 30킬로미터로. 치기 좋게. 멋지게.

영화 '초속 5센티미터' 중에서 (사진: 네이버 영화)

'초속 5센티미터'라는 영화는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를 제목으로 한 첫사랑 추억 영화다. 자연의 속도는 대개 일정하고 서두르지 않는다. 꽃이 피고 벌이 꿀을 따고 구름이 흐르고 눈이 내리는 그런 속도. 살면서 가끔은 카메라가 없더라도 사람이 만든 것들은 여전히 빠르더라도, 속도를 조금 늦추고, 하던 것은 조금 덜 하며 천천히 바라보는 여유를 찾고 싶다. 세심히 려면 천천히 야 한다. 그래야 삶이  안전해진다. 당신의 몸도 마음도. 그리고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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