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회사 근처 커피숍 문 여는 시간에 들러 한산한 2층 창가에서가끔 커피를 마신다. 창밖을 보면시간이 지날수록 출근하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는데,옷차림도 걸음걸이도 제각각이다.정장부터 캐주얼까지, 어떤 이는 바쁜 걸음, 또 어떤 이는 천천히, 터벅터벅, 사뿐사뿐, 성큼성큼... 제각기 길을 따라 걷는 모습이 마치 패션쇼에서 런웨이를 걸어가는 모델들 같아보인다. 물론 모델들처럼당당하고 시크한 포즈를 취하고 그러지는 않는다. 아침 일찍 일터로 향하는직장인의 모습이그렇듯뚜벅뚜벅 갈 길을 찾아 회사로 향한다.
아침 이른 시간 '출근길 뷰' 커피숍 자리
어찌 보면 출근길도 런웨이, 퇴근길도 런웨이, 회사일도,집안일도 런웨이... 사는 일은여러런웨이에 서는 일이다. 모델이 그때그때 다른 옷을입고런웨이에오르듯,나도 매 순간다른 역할의 옷을 갈아입고 삶의 런웨이를 걸어왔다. 어릴 땐 주로 아들, 동생, 친구, 좀 커서는 직장 선후배, 동료, 남편,아빠라는옷... 새 디자인의옷은별로 선보이지도 못하고매번 입던 옷 비슷하게 입고그대로 런웨이에나오지만,다만 애매하게 옷을 겹쳐 입지는 말아야지,걸음만큼은 제대로걸어야지 한다.
모델의 워킹은 마치 옷이 걷는 것같아 보이도록 하는 게 이상적이라고 한다. 몸의 움직임과 조화를 이루어 옷이돋보이도록,그들은 정돈된 걸음으로흔들림 없이 런웨이를 걷는다. 삶의 런웨이에서 내가 입는 여러역할도 그렇게잘 어울리면 좋겠다. 옷들이 돋보이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무난하게 보이기만 해도 좋겠다. 역할의 옷이 어색하면시선이흐트러지고 몸이기우뚱거리는 순간이 온다.삶의런웨이에서 나는 가끔당황스럽다.
아주 오래전에런웨이에 서본 적이 있다. 대학 시절 전통춤 동아리 활동을 했었는데, 동아리 지도교수께서 한복 연구가인 지인이 여는 패션쇼에 보조 출연을 부탁하셨다. 옛 벽화나 민화를 통해 전해지는 전통 복식을 현대에재현하여 선보이는 뜻깊은 행사였다. 그중에서우리가 맡은 역할은 말 타고 활 쏘는 고구려 무용총 벽화 속 무사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실제 말을 동원할 수는 없었기에, 우리는 '당다가다가다가~' 하는 장구 반주와 춤으로 군무콘티를 완성했다. (아. 우리가 싸이 말춤의 시조였던가...)
시내 호텔에서 열린 패션쇼 날, 많은 사람 앞에서실수라도 할까 봐 엄청 긴장했다.패션쇼출연진 중에 배우 유인촌도있었다. 사전 리허설 때 보이지 않더니행사 얼마 전에 도착했다."아. 그래 이거 이렇게 걸어 나가면 되는 건가?" 임금역할이었는데,연출과 얘기를 주고받더니능숙하게 왕으로 변신하여 무대를 휘저었다. 그여유롭고 당당한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정작 나는 '당다가다가다가~'반주에잘 달려 나가긴 했는데, 런웨이 밝은 조명 아래에눈이 부셔스텝이 좀 꼬였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원래 사냥이란 실내에서 하는게 아니다.
삶의 런웨이에서는 당당해야 한다. 무대 뒤에서급히 옷을 갈아입었더라도 흐트러짐 없이,두근두근떨리고 옷이 조금 부자연스럽더라도 뚜벅뚜벅, 아랫배에 힘주고, 몸을 쭉 펴고, 정면을 응시하고, 자신감있게...누구는당당하다고, 누구는 도도하거나뻔뻔하다고 얘기할 수 있다.어차피모두 다 좋아할 수는 없고, 모든 일을 다 잘 해낼 수도 없다.연연하지 말고 자신감 있게런웨이를걸으면 된다.
영화 '크루엘라' 중에서 (사진:네이버 영화)
커피숍에 있는 동안 출근 시간이가까워졌다. 음악이 켜지고 무대에 불이 들어왔다.이제옷 갈아입고 런웨이로 나갈 시간이다. 스스로 멋지다고 생각하고 조금은자뻑스러워도 괜찮다. 삶은원래뻔하기보다는 뻔뻔하게, 당하기보다는 당당하게사는 것이다. 오늘도힘차게 때로는 능청스럽게 런웨이를 걸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