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래도 Aug 09. 2021

물걸레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휴가를 내긴 했지만 멀리 가지는 않았다. 차로 1시간 거리 자연휴양림에 잠깐 다녀온 후에 집 근처에 머물렀다. 전에는 휴가 때마다 새로운 곳을 찾았다. 비행기로 외국에 나가거나, 집에서 멀리 떨어진 낯선 도시, 또는 섬 같은 곳에 가서 익숙하지 않은 을 즐겼다. 올해는 그렇게 떠날 상황이 되지 않았다.


느지막이 일어나 집 근처를 거닐었다. 늦은 아침 길에 나온 , 비둘기와 길고양이도 나와 같이 느리게 걸었. 나무가 걸러주는 햇볕과 가끔 스치는 바람, 목적지 없는 산책 마음이 편안했다. 오랜만에 시내에 나가 전시회를 찾아가고, 점심시간이 아닌 시간에 밥을 먹었다. 위가 소란하지 않고 바쁜 사람이 없어 좋았다. 평소와 다른 시간에서는 익숙한 곳도 새롭게 느껴졌다.

집에 머물다 보니 평소에 잘 안 띄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 먼지가 소복이 내려앉은 장식장도 그중 하나. 여행 다녀올 때마다 작은 소품 하나둘씩 사서 올려놓았는데, 그동안 먼지가 꽤 쌓였다.  참에 닦아주기로 했다. 물건들을 하나씩 들어내어 닦다 보니 먼지와 함께 여행의 추억이 다시 묻어난다. 이걸 어디서 가져왔더라... 기억이 아득하기도 했지만, 담긴 추억은 잊힌 기억보다 아름다웠다.


장식장 유리에 쌓인 먼지도 닦기 시작했다. 먼지가 오래 내려앉아 마른걸레로는 닦이지 않았다. 물을 적셔 여러 번 문질러야 쌓인 먼지가 닦였다. 그래도 물걸레로만 닦고 그냥 말리면 유리에 지저분한 닦인 얼룩이 남는다. 유리가 채 마르기 전에 마른걸레로 뽀송하게 닦아줘야 다시 맑고 끗한 유리로 돌아온다. 맑게 닦인 유리판 위에 소품들하나하나 다시 올려놓으니 마음도 같이 한번 맑게 닦인 기분이다.

마음도 어딘가 오래 머무르다 보면 그만큼 먼지 같은 감정이 쌓인다. 유리처럼 맑았던 기억, 희망, 관계, 믿음에 먼지가 천천히 내려앉는다. 그러다가 가끔 갑자기 별 것도 아닌데 울컥, 슬픔이 올라올 때가 있다. 슬픔은 마음속 깊은 곳 우물 같이 담긴 감정다. 문득 슬픔이 축축하게 차올라온다면 마음에 쌓인 무엇인가 닦아낼 때가 된 것이라 생각하자. 슬플 때는 그냥 슬퍼하면 된다. 슬픔은 물걸레처럼 마음에 쌓인 먼지를 조금씩 닦아낼 것이다.


기쁨 가볍고 단순한 감정이다. 마음속에 담겨있기보다는 마음 표면에 부는 따뜻한 바람 같은 감정이다. 이를테면 뽀송한 마른걸레 같아서, 슬픔이 닦아낸 자리의 물기를 말려 얼룩 없이 잘 마무리하도록 돕는다. 슬픔이 지나간 후 뒤따찾아와서, 기쁨은 마음이 제대로 예전 같이 맑은 모습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감정이다. 그래서 마음의 청소는 슬픔의 물걸레질로는 충분하지 않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경삼림'에 나오는 이야기다. 경찰 663(양조위)은 연인과 이별을 겪은 후 마음이 힘든 날을 보낸다. 혼자 사는 집에 수도를 잠그지 않아 물이 넘쳐버리면 집이 눈물을 흘렸다고 생각하고, 집에 돌아오면 보통 작아진 비누, 젖은 수건, 낡은 곰인형과 중얼거리며 대화를 나눈다. 그가 매일 들르던 패스트푸드점 점원 아비(왕정문)는 그를 좋아하게 되어 그의 옛 여친이 맡긴 열쇠로 그의 집에 몰래 드나들며 오래된 물건들을 하나둘 새 것으로 바꾸 슬픔의 얼룩을 지워간다. 아비그는 집에서 마주치게 되면서 둘의 관계가 이어진다. 슬픔을 닦아내고 서로 희망을 꿈꾸는 이야기는 영화음악 'California Dreamin'을 따라 흐른다.

마음속에는 다양한 감정들이 다양한 깊이에서 다양한 비중으로 들어있다. 그런 감정들이 쌓이고 올라오고 닦이고 사라지며 살아간다. 오랜 진화의 과정에서 사람에게 다양한 감정들이 남아있다는 사실은 살아가는 데 그런 감정들이 꼭 필요해서 그렇다. 다만 내 마음을 이해하고 닦아가며, 기왕이면 감정의 비중을 나에게 더 편안하도록 돌보며 살아가면 좋겠다. 혹시 주위의 다른 이가 스스로 슬픔을 닦고 있다면, 마른걸레로 그의 마음을 기쁘고 뽀송하게 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더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야구는 너무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