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함께 코로나 양성자가 되어 집에 갇혀 일주일간 재택근무를 했다. 첫날에는 아이들은 다 음성이라서 아내와 둘이만 한방에서 온종일 함께 지내야 하는 당황스러운 상황에 놓였는데(영화에서 보는 엘리베이터에 갇히는 느낌이랄까), 다행인 건지 이튿날 딸의 확진자 동참으로 활동 반경이 방 두 개로 넓어졌다. 어찌어찌 재택근무 일주일을 마친 후 아내가 나한테 그랬다. "자기 일하는 거 옆에서 보니 회사에서 나름 중요한 일 많이 하는 사람인가 보다."
사실 20년 넘게 같이 살아도 아내는 내가 회사에서 무슨 말을 하고 어떻게일하는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집에서 거실 바닥에 달라붙어 가끔 책이나 뒤적대는 모습만 주로 보다가 바쁜 업무 모습을 보니 좀 달라 보였을 수도 있겠다. 섬유 관련 업종이 우리나라 대표 산업이던 시절, 아버지는 방직회사에서 일하셨다. 내가 초등학교 때공장 견학 행사로 어머니가 아버지 다니는 회사에 다녀오셔서는, 공장에 소음도 먼지도 많고 아버지 참 고생하시더라는 말씀을 하셨다. 요즘에는 그렇게 직원 가족을 회사에 부를 리도 없지만, 만약 찾아온다고 하면 아 정말 힘들게 사는구나 싶게 적당히 연기해줄 텐데... 얘기하며 좀 웃었다.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2021) 포스터
가깝다고 여기는 상대에 대해 얼마만큼이나 알고 있는지 생각했다. 영화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는 막차를 놓친 남녀 대학생 무기와 키누가 우연히 만나 첫차를 기다리며 주점에서 밤새 대화를 나누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얘기하다 보니 좋아하는 작가, 영화, 음악 취향이 똑같고 심지어 같은 신발까지 신고 있었다. 서로 같은 관심사로 사귀니 같이 있는 시간이 너무 좋아 동거를 시작하는데, 계속 그럴 줄 기대했던 생활이 취업 갈등과 이런저런 바쁜 일들, 조금씩 느껴지는 가치관 차이로 인하여 달라지며 그들은 이별을 예감한다. 꽃다발 같이 화려한 사랑의 시절은 금방 지나버린다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을 공감 있게 그린 영화다.
"이렇게나 잠깐 좋고 오랫동안 나삐 지낼 거였으면 왜 이리 허무히 젊음을 너란 애에게 다 써버렸을까. 어쩜 어쩜 어쩌면 버리긴 아깝고 가지긴 좀 그래. 시시해 지루해." 이승환과 선우정아의 듀엣곡 '어쩜'이라는 노래 가사 중 한 구절이다. 노래의 뮤직비디오에서는 시든 꽃들이 필름을 거꾸로 돌려 다시 꽃다발로 돌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무엇인가 꼭 맞는다는 느낌으로 불타는 사랑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처음에는 뜨겁게 장작이 타오르지만 나중에는 그냥 남은 숯불의 열기로 살아진다. 숯불이 꺼지지만 않도록 가끔 장작 몇 개씩 넣어주면 온돌의 열기는 유지된다. 활짝 핀 꽃, 타오르는 불꽃이 사랑의 전부는 아니다. 삶에서 그런 시간은 길지 않으니 찾아올 때 누리면 된다.
이승환, 선우정아 싱글 '어쩜' MV (2021.11)
같이 지내는 시간과 공간이 제한되고 서로 관심사가 같을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를 보고 판단하는 일에 대해 대선 출구 조사 같은 정확도를 기대하면 안 된다. 아이의 생활이나 직원의 업무 일부분만 보고 잔소리하면 서로 마음만 상하는 것처럼, 살면서 겪는 많은 갈등은 얼마 되지 않는 표본으로 전체를 추정하는데 따른 오류에서 발생한다. 길어야 몇 년 살펴보고 결혼 상대를 정하고, 하루 중 몇 시간 정도 같이 지내며, 사실 서로 얼마 지켜보지도 않는다. 우리는 생각보다 서로를 잘 모른다.
거리를 하얗게 물들였던 벚꽃이 바람에 날리면서 듬성듬성 푸른 잎이 보이기 시작한다. 많은 이들은 벚꽃이 피는 시절에나 벚나무를 알아보고, 나머지 계절에는 그냥 여느 나무와 구별 없이 여기며 지낸다. 사랑은 어찌 보면 꽃다발이 아니라 꽃나무 같은 거라 생각한다. 꽃이 떨어지더라도 벚나무임을 아는 것, 푸른 잎을 돋우고 열매를 맺고 나중에는 마른 가지로 같이 겨울을 나는 것, 매년 줄기를 굵게 하며 나이테를 쌓아가는 것. 다시 꽃 피는 시절을 같이 기대하는 것. 그 정도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