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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캡슐의 마음

by 그래도

친구들과 나선 남산 산책길에 서울 천년 타임캡슐 광장에 들렀다. 남산에 이런 곳이 있었나. 잔디로 둘러놓은 둥근 광장에 커다란 맷돌이나 UFO같이 생긴 커다란 대리석이 놓여있다. 수도가 된 지 천 년 되는 해인 2394년에 꺼낸다는 계획으로 서울시가 1994년에 타임캡슐을 만들어 그 안에 넣어놓았다. 계획대로 되려면 서울이 그때까지 대한민국 수도로 무사해야 하겠네, 그런데 당연히 나는 무사하지는 않겠구나, 세상은 나 없는 채로 돌아가고 있겠네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 묘해졌다.


타임캡슐 안에는 삐삐, 화투, 필름, 컴퓨터, 배꼽티, 교과서와 지하철 파업 영상 CD 같은 생활용품을 골라 넣었다고 한다. 만약 400년 전에 타임캡슐을 묻어 지금 꺼내면 어떨지 생각했다. 인조 시기의 한복, 성리학책, 동의보감, 화포, 소총이나 밥그릇, 임진왜란의 기록 같은 것들이 들어있으려나. 그 당시에 지금 디지털 세상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듯 400년 후 타임캡슐을 열어보는 후손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밀레니엄 직전인 1990년대에는 지역 행사나 학교에서 타임캡슐을 많이 묻었다. 남산 타임캡슐처럼 만든 이들이 모두 사라질 미래에 열게 되어 있는 것도 있었지만 훗날 정해진 시간에 꼭 만나서 같이 꺼내보자는 다짐으로 만드는 경우도 많았다. 어느 경우든 타임캡슐을 만드는 일에는 설렘과 희망이 담겨있었다. 열어보는 때에는 우리가 꾸는 꿈이 이루어져 있기를, 그때도 여전히 잘 살고 있기를 바라는 기대를 담았다.


요즘은 굳이 타임캡슐을 묻을 필요가 없어졌다. 페이스북은 시키지 않아도 몇 년 전 올렸던 포스팅이라며 옛날 사진과 글을 보여준다. 디지털이 타임캡슐을 대체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전보다 훨씬 많이 찍고, 쓰고, SNS에 올린다. 시간을 횡으로 잘라 남긴 것이 타임캡슐이라면, 우리는 매일 지층처럼 디지털 기록을 쌓아가고 있다.

현재를 가꾸는 일은 과거를 돌보고 미래를 꿈꾸는 일이다. 타임캡슐은 미래에 기록을 남기기 위해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현재를 더 뜻깊게 살아가자는 다짐이지 않았을까? 우리가 아름다운 노을을 같이 바라보거나 좋은 음식을 앞에 두고 각자 핸드폰을 들고 찍는 이유는 기록을 미래에 남기기보다 그 순간을 즐기고 가까운 사람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 가깝다.


나는 옛날 물건들을 품고 남산에 묻힌 타임캡슐을 보면서는 타임캡슐에 마음이 있다면 언젠가 환하게 열릴 때를 기다리거나, 혹시 안 열릴지 모르는 걱정도 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돌이켜보면 어쨌거나 상관없지 않다고 여기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만들어 묻을 때 그때 사람들이 설레는 마음, 미래의 희망과 꿈을 그곳에 담았다면 이미 타임캡슐이 할 일은 다 한 것이 아닐까? 마치 스마트폰 폴더 가득 사진을 담아가며 오늘도 순간순간 작은 행복을 찾는 우리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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