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가 있던 그 집
작업이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한편에 둘둘 말려있는 커다란 두루마리 천을 풀어 마루 바닥에 펼쳤다. 바닥의 한 뼘 크기 격자 연속무늬에 테이프를 붙여 표시하고 그 선에 맞춰 커터칼로 천을 잘라냈다. 보자기 재질의 천이 찌이이익하는 소리와 함께 잘려 마루 한쪽에 차곡히 쌓였다. 중학교 1학년 즈음의 일이다. 아버지가 다니던 방직 공장의 일부 업무가 갑자기 폐쇄되었다. 회사 사보의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란에서 아버지 이름을 보았다. 그때 형들은 고2, 중3이고 나는 삼 형제의 막내였다. 가족의 생계를 지켜야 했던 아버지는 멀리 떨어진 지방의 작은 회사에 취직했다. 아버지를 주말에만 가끔 보게 했던 그 회사도 만만치 않았는지 아버지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이것저것 재료를 들고 와서 마루에 놓고 무엇인가 만들기 시작했다. 천을 마룻바닥 선 따라 자르면 어머니가 재봉틀로 가장자리를 다듬어 박음질했다. 중간에 실크 스크린으로 회사 로고를 찍으면 큰 자루가 완성되었다. 아버지를 내보낸 그 회사 로고. 찍는 중에 가끔 페인트가 번져 불량이 되었다. 아버지 마음에도 슬픔이 번지지 않았을까? 아버지는 참아냈고 마루는 작업실이 되었다.
요즘 거실은 보통 TV와 소파를 놓고 머무는 생활공간이지만 그 시절 마루는 달랐다. 안방, 부엌, 건넌방, 셋방, 마당으로 통하는 유리문이 둘러싼 집 안의 광장 같은 공간이었다. 3인분까지 내리는 쌀통과 시끄러운 냉장고, 과실주가 든 장식장, 문고판 책들이 꽂힌 책장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나는 종종 뒹굴거렸고 자주 쿵쾅거렸다. 어머니는 마루에서 다듬이로 이불천을 두드리시고 발로 이불 천을 밟을 때마다 나를 불러 업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야 무겁게 눌려 천이 잘 펴진다고 했는데, 나는 그 기분이 참 좋았다. 지금 생각하면 업기는 조금 무거워진 막내를 그냥 더 업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마루는 집에 있던 글러브로 형들과 권투를 하면 링이 되었고, 앉아서 탁구를 치면 탁구장이 되었다. 마루 무늬는 링의 안팎, 인과 아웃을 판별하는 라인이었다. 마루가 작업실이 되며 그 무늬는 작업 라인이 되었다.
마루가 있던 그 집에서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중학교 시절까지 보냈다. 부뚜막, 아궁이, 다락방, 뜰팡, 장독대 같은 공간과 요강, 다듬잇돌, 다이얼 전화기, 미싱 같은 물건이 떠오른다. 추억은 소리로도 남아있다. 둔덕 너머 장항선 화물 열차가 울려대는 빠아앙하는 경적, 생쥐가 천장을 가로지르는 다다다닥 소리, 옆 골목에 사는 박수무당 집 덩덩 덩더꿍 굿하는 소리. 마루에서 자루 만드는 일이 끝나고 부산했던 마루는 다시 예전 모습을 찾았지만 곧 이사를 가게 되었다. 아버지는 집터를 사서 인부를 부려 집을 짓고, 조금 살다가 팔고 하는 일을 반복하는, 이를테면 집장사 일을 시작했다. 그 이후로는 새집으로 이사를 자주 다녔다. 가족의 생계는 해결되었지만 새집에는 마루라고 부를 공간은 더 이상 없었다.
가끔 생각난다. 마루 창으로 들어오던 햇살과 바람, 뺨에 느껴지는 서늘한 마룻바닥의 감촉도, 그리고 다섯 식구 생계를 챙기려 마루에서 천을 잘라 자루를 만들던 지금의 나보다 훨씬 젊던 아버지, 그리고 등에 업히면 하늘을 둥실둥실 떠다니는 느낌이 났던 포실포실했던 어머니의 등, 그때 나지막이 부르던 어머니의 둥기둥기 노랫소리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