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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와 같은 마음

by 그래도

아파트 관리사무소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며칠 뒤 변압기를 교체해야 해서 몇 시간 동안 아파트 전체 단전이 된다고 했다. 평일 낮이라 전기 안 들어온다고 별일 있겠나 싶었지만 혹시 대비할 일을 생각했다. 냉장고가 떠올랐다. '오래 멈추면 안될텐데...' 집에 있는 온갖 가전제품들, TV 컴퓨터 선풍기 전자레인지 세탁기 오디오 청소기 드라이기 같은 것들은 평소에는 가만히 쉬고 있다가 필요할 때만 작동한다. 그와 달리 냉장고는 집에 없이 돌아가는 유일한 가전제품이다. 단전 때 음식물 걱정을 하다 보니 냉장고 존재가 새삼 느껴졌다. 살면서 겪어보니 세상에서 엇을 잘 간직하는 일은 참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이 물건이건 혹은 마음이건, 그 마음이 간절하건 은밀하건, 무언가 간직하고 있다는 말은 계속 애쓰고 있다는 말이다.


집에서 몇몇 반려동물을 키웠다. 아내가 집안을 활보하는 동물은 질색하는 탓에 타협이 가능한 것은 사슴벌레, 작은 물고기, 달팽이 같은 친구들이었다. 대부분 그렇듯 아이들 관심이 시들해지면 결국 뒷바라지는 부모의 몫이 된다. 다행히 우리 집에 온 친구들 대부분 무사히 살아갔다. 사슴벌레 애벌레는 성충이 되어 짝짓기를 하고 산란목에 알을 낳더니 다시 애벌레와 번데기를 거쳐 성충 후손으로 이어졌고, 작은 몽크호샤 물고기는 7년 넘게 장수했으며, 귀여운 초록 달팽이 애플스네일은 등껍데기 갈라지고 어항 뚜껑에 알을 붙여놓을 때까지 살았다. 매일 먹이를 넣어 주고 청소도 해주었는데 그렇다고 주인을 알아보길 하나 별다른 애교가 있나 주는 밥만 냅다 먹어대는 그들을 돌보며 참 오래 애썼던 시간이었다.

마지막 물고기가 떠난 후에 어항에 깔려있던 작은 돌멩이들을 화분 위에 깔면서 식물에 집중했다. 뭔가 솎아내거나 모양을 위해 가지를 자르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이라 물 주고 영양제 주고 분갈이 정도만 하며 지냈다. 식물들도 잘 컸다. 십 년 넘게 가지 뻗고 쑥쑥 자라는 고무나무, 딸의 키만큼 크면서 잎도 커지는 해피트리, 잊어버릴만하면 빨간 꽃을 피우는 군자란, 양재동 꽃시장에서 와서 커피는 대체 언제 열리나 5년째 기다리는 커피나무 등등.


가끔 잎이 시든다. 나는 잎 수명이 다해서 그런 것인지 식물에 이상이 생 건지 처음에는 잘 몰랐다. 오래된 잎이 떨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나 가끔 배수나 병충해가 이유인 적도 있었다. 다만 잎이 한꺼번에 우수수 떨어지거나 가지가 마르는 정도만 아니면 괜찮다 여겼다. 나이 들어가며 생기는 일도 나는 그렇게 대했다. 어떤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어떤 것은 주의해야 할 신호인지, 어떤 관성은 유지하고 어떤 습관은 버려야 하는지 구별하려 노력했다. 삶은 끊임없이 흔들린다. 마음이 한번에 우수수 떨어져버리지 않도록.

마음 항상 애쓴다. 래서 냉장고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삶에서 소중한 것들을 담아 보관하고 꺼내고 다시 넣고 그런다. 세상은 온갖 꾸준한 것들이 함께 유지해 간다. 그래서 모든 꾸준한 것은 아름답다. 해도 달도 온갖 자연도 삶도 마음도 냉장고도. 단전을 앞두고 냉장고에 있는 것들을 들여다본다. 냉동실에 한참 들어있어 말라붙은 것들. 아끼다가 유통기한을 살짝 넘긴 것들. 마음 한 구석에는 어떤 것들이 얼려있고 어떤 것들이 꺼내기 좋게 담겨있을까? 유통기한을 지나고 있는 것은 없을까? 꺼낼 것은 꺼내고, 버릴 것은 버리고. 애쓰는 마음에게 꼭 모든 것을 보존하려 애쓸 필요는 없다는 말을 건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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