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시대 오역하지 않기 위한 소통법'. 번역가 황석희의 강연 주제였다. 동시간대 열리는 강연 셋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했는데, 나는 망설임 없이 과학자나 유튜브 크리에이터 강연을 뒤로하고 그를 선택했다. 어느 때부터인가 영화 마지막에 뜨는 '번역 황석희'라는 이름이 반가웠고, 외국어 대사를 우리말로 찰지게 옮기는 그의 번역 이야기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은 누구나 번역가'라는 말로 강연을 시작했다. 번역은 단지 외국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일만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을 말로 만들고 그 의미를 헤아려 받아들이는 일도 포함한다고 했다. 원작에 맞지 않게 옮기는 오역은 번역가에게 두렵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인 것처럼, 우리 일상 또한 상대의 마음에 대한 오역과 깨달음의 연속이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상대에게 애정을 가지고 그 마음의 원문을 살펴 다정하게 번역하려 애쓰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진행한 한 프로젝트를 소개했다. 듣고 나서 상처가 도저히 극복되지 않는 모진 말을 보내주면 그가 20년 번역 경력을 바탕으로 다정하게 들리도록 번역을 해주겠다는 프로젝트였다. 공지를 올리자마자 금세 300여 개의 못된 말이 모였다. 자신 있게 시작했지만, 가족, 친구, 직장 동료에게서 전해진 온갖 말들을 하나하나 다정하게 옮기는 작업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드는 일이었다.
아버지가 딸이 공부 안 한다고 "너는 누구를 닮아 그 모양이냐?"라고 뱉은 말을 그는 "나를 닮은 네가 똑똑하고 후회 없이 크면 좋겠어."로 번역했고, "네가 내 자식이 아니면 좋겠어."라는 험한 말도 "나처럼 준비 안 된 사람에게 너같이 귀한 아이가 태어난 게 너무 괴로워."라는 말로 다시 태어났다.
물론 그 번역은 말한 이의 뜻과 다른 오역일 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는 적극적이고 다정한 오역으로 마음을 다독일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냉소나 합리화는 쉽지만 다정함은 몇 배로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정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살피고 상대가 숨 쉴 여지를 남겨야 하기 때문이다. 살피는 일은 결국, 살리는 일이다.
강연을 들으며 다정한 번역은 말에만 국한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전, 한 인물 사진 전문 포토그래퍼가 진행한 'Finally ME'라는 영정 사진 프로젝트가 떠올랐다. 장례식에 쓸 사진을 미리 찍는 목적이 아니라 사진을 찍는 사람이 미리 자신의 죽음을 떠올리며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자는 의도의 프로젝트였다. 촬영에 앞서 질문과 답을 나누며 대상과 감정을 공유하고 차분히 살핀 후에 찍힌 사진 속 얼굴에는 그의 지내온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사진가 역시 사진으로 누군가의 삶을 번역하는 직업이 아닐까 싶었다.
글을 가끔 쓰는 나 또한 '다정한 번역가'이고 싶다. 글이란 내가 느낀 것들을 나만의 표현으로 옮기는 일이니 이 또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오역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겠지만 주변과 마음을 살피는 일을 계속하다 보면 조금 더 다정한 번역에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번역이란 원작을 잘 반영하는 일이지, 원작에 없는 것을 창조하는 일은 아니다. 좋은 노래가 반복해서 리메이크되며 계속 새롭게 번역되듯, 중요한 것은 원본이 되는 마음을 잘 가꾸는 일일 것이다.
황석희 번역가의 강연에서는 사전 안내에 적혀 있던 'AI시대'라는 말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아마 주최 측이 관심을 끌기 위해서 번역가의 뜻을 의도적으로 오역했나 보다. 물론 세상을 살피는 일은 AI가 더 잘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식물이 땅을 푸르게 번역하고, 별빛이 하늘을 아름답게 번역하듯, 마음을 다정하게 번역하는 일만큼은 사람이 앞으로도 계속 잘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