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것을 먼저 쓰는 마음

by 그래도

겨울이 되면 제주도의 한 농장에 귤을 주문한다. 지인을 통해 알게 된 곳인데, 맛도 가격도 괜찮아 매년 한 박스씩 받아왔다. 그런데 올해는 예년보다 터지거나 무른 귤이 제법 섞여 있었다. 그런 것들은 골라 비닐봉지에 따로 담고, 멀쩡한 귤은 김치통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봉지에 담긴 귤부터 먼저 먹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 못 먹게 될 것 같아서였다.


아이들이 크면서 집에 별로 있지 않으니 아내와 내가 부지런히 꺼내 먹었는데도 봉지에 담긴 귤이 다 떨어질 때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상태가 좋은 귤을 먹는 기분은 좋지 않았지만 이것만 다 먹으면 이제 좋은 귤을 먹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봉지 귤을 다 먹고 나서 새귤이 담긴 김치통을 열었다. 그런데 이제 그 안의 귤들마저 하나둘 무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 이제 다시 무른 귤부터 먹어야 하나. 진작 좋은 귤 먼저 먹을 걸하는 후회가 들었다.


해외 여행을 다녀오면 간식이나 특산물을 사 온다. 선물로 나누고 남은 것 중 맛난 것들은 아껴 먹겠다고 따로 두었다가 잊어버리고 유통기한이 지나서야 발견하곤 했다. 예쁜 그릇도 마찬가지다. 손님 올 때 쓰겠다고 아껴두었다가 제대로 꺼내 쓰지도 못한 채 장식장 속에서 하릴없이 낡아간다.


누군가 물은 적이 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는데, 어느 쪽을 먼저 듣고 싶으냐고. 나는 나쁜 소식부터 듣겠다고 했다. 좋은 소식 먼저 들었다가 뒤이어 나쁜 소식을 들으면 그 기쁨이 한순간에 사라질 것 같아서였다. 좋은 소식은 남겨두고 싶었다. 희망이라는 건 원래 끝으로 남겨 두는 것이 아닐까, 끝이 좋아야 다 좋은 것 아닐까.


식물은 빛이 있는 쪽으로 조금이라도 더 가지를 뻗고, 동물은 늘 좋은 먹이를 먼저 골라 먹는다. 그런데, 사람은 종종 좋은 것 앞에서 멈춘다. 훗날 더 좋은 때를 위해, 미래를 위해 남겨두려고 한다. 하지만 많은 것들은 가장 좋은 시기를 흘려보내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다시는 경험할 수가 없게 된다.


딸에게 물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다면 어느 쪽을 먼저 듣겠냐고. 딸은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당연히 좋은 소식부터 들어야죠." 좋은 소식으로 얻는 기쁨이 나쁜 소식을 견딜 힘이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 원래 사는 게 그런 거지 싶었다. 즐거움을 품어야 어려움을 헤치는 힘을 얻는 거라고.


나도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좋은 말은 미루지 않고 건네고, 아끼는 것 일수록 꺼내어 자주 쓰고, 좋은 것이 있다면 먼저 내어 주기로. 그렇게 살다 보면, 세상 모든 것은 나에게 '좋은 것' 아니면 '그다음으로 좋은 것'의 순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다정하게 번역하는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