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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임 May 07. 2023

비 오는 날은 글을 시작하기 좋은 날이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풍경을 보면서도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려놓지 않는 건 직무유기에 해당함으로 당신을 체포합니다.'

길가의 물 웅덩이에 쉴 새 없이 동그라미를 그리는 빗방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어디선가 그런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니, 직무유기라니요? 이거 놓으세요! 마땅히 쓸 것도 없단 말이에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내 손은 가방 속의 노트북을 꺼내어 펼치고 전원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사실 비 오는 날 나에겐 막걸리와 파전만큼 생각나는 게 글쓰기다.


빗방울이 세상의 먼지를 끌어안고 땅 위 내려 놓듯이, 마음속 먼지까지도 차분해지는 기분이 든다.

차분한 기분과 촉촉한 감성만큼 글쓰기에 적합한 환경이 어딨겠는가.

물론 글의 종류에 따라 최적의 환경은 다르겠지만, 내가 주로 쓰는 글들은 그런 차분함과 촉촉함 속에서 더 잘 써진다.

하지만, 차분하고 촉촉하다고 무조건 한 편의 글이 완성되는 건 아니다.

단 한 편의 글이라도 써본 사람들은 공감하겠지만, 시작이 있다고 무조건 끝이 따라오는 건 아니니까.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게 세상의 이치라고 하던데, 글쓰기는 번번이 그 법칙을 비껴간다.

그런 의미에서 '비 오는 날은 글쓰기 좋은 날이라기 보단 글을 시작하기 좋은 날'이라고 정의하는 게 더 적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 글을 시작하기 좋은 날. 그래서 나는 비가 오는 날마다 가능하다면 펜을 들거나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려왔다. 하지만, 대부분은 마침표의 끝에 닿지 못하고 완성된 '글'이 아닌 '낙서'가 되어버렸다. 그 글이 담긴 종이 조각은 어디론가 사라져 '쪽지 실종 사건'이 되거나, 온라인에 쓴 글은 임시저장이 된 채 기억에서 잊혀져 갔다. 글을 쓰는 사람에겐 영원히 풀지 못할 것만 같은 미제사건 같은 거라고 할까.

나는 비 오는 날을 함께 했던 그 소중한 글들을 방치했고, 마무리 짓지 못해서 계속 임시저장만 남발하는 연쇄 임시저장마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린다.

완전한 마무리까지는 자신 없지만, 어쨌든 글을 시작하기엔 최적의 환경이니깐.

글이 마무리되지 못할까 봐.

어차피 또 임시저장으로 끝날 텐데 뭐. 하고 시작조차 하지 않으면 '직무유기죄'를 선고받고 불편한 마음의 감옥에 갇힐지도 모르니까.


부디 오늘은 '발행'의 축복으로 마무리될 수 있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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