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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임 May 19. 2023

아메리카노 금단증상

누가 커피를 기호식품이라고 했는가..

'현재 뒷목 나들목에서 극심한 정체가 예상되오니 통행 예정인 혈액들은 이 점 유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어둠이 세상을 덮은 늦은 시간. 

뒤통수 아래쪽에서 뻑뻑한 기운이 전해지더니, 몸속 어딘가에서 혈행안내 방송이 들려왔다.

이거 불길한데.. 조금만 더 정체되면 두통이 오겠는걸..


불길한 예감을 맞이하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역시 두통이 도착했다.

묵직한 뒷목.

정확히는 뒷목과 뒤통수가 만나는 그 지점 어딘가. 뒤통수와 뒷목의 핏줄이 만나는 나들목쯤이다.  

혈액도 출퇴근 시간이 있는 건가. 왜 이렇게 러시아워의 도로처럼 막히는 걸까.

잠들어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갑자기 시작된 미세한 두통으로 머리가 점점 무거워졌다.  



사실 조금은 우려했던 상황이다.

유난히 바빴던 하루를 보내고 저녁이 되었을 때, 나는 오늘 커피를 마시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뭐 대단한 걸 깨달은 건 아니지만, 여느 깨달음 뒤에 기쁨이나 환희가 따라오는 것과는 달리, 커피의 부재를 깨닫자마자 미묘한 불안함이 연이어 밀려왔다. 커피를 안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루가 너무 멀쩡하게 지나가고 있다는 것에 대한 불안함.


잠들 시간을 얼마 남기지 않았을 때 불안감은 두통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로또 번호 찍을 땐 한 번도 맞지 않던 '감'이 이럴 때만 잘 맞아. 도움 안 되는 녀석 같으니라고.'


예전에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그날은 오후쯤에 두통이 왔다.

처음엔 그저 스트레스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이라 여겼었는데, 아무 생각 없이 커피 한잔 마시고 나니깐 두통이 거짓말처럼 사라졌었다. 그날도 오전에 커피를 마시지 않은 날이었고, 오후에 두통이 왔다.

하.. 불필요한 피곤함을 잊기 위해 마시는 커피 한잔의 부재가 이런 식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고?

커피란 하루를 조금 더 매끄럽게 하는 윤활유 같은 도구에 불과하다고 여겼었는데, 이 정도면 그저 '불과한 도구'가 아니라 '필수품'이 더 적합한 용어가 아닌가? 하는 씁쓸함이 그날의 기억에 묻어있다.

그래서 나는 알고 있다.

오늘 마시지 않은 커피를 들이켜면, 이 두통도 금세 사라질 거라는 걸.


빌린 기억도 없는 돈을 내놓라고 독촉하는 빚쟁이들처럼, 내 몸은 카페인을 상환하라고 독촉하고 있었다.  하지만, 곧 자야 할 이 시간에 커피라니.. 이 시간에 마시는 커피는 두통과 함께 잠도 쫓아 버릴 위험이 크다.


잠깐 고민하던 나는 일단 유튜브에 '두통 스트레칭'을 검색한다.

재생 버튼을 누르고 의자를 밀어낸 후 자리에서 일어선다.

두 손을 깍지 끼고 뒤통수를 잡은 후 아래로 지그시 눌러준다. 하나 둘 셋넷다섯.. 스물.  이번에는 두 손을 턱 끝에 대로 얼굴이 천장을 향하도록 밀어 올린다. 하나 둘 셋넷다섯여섯.. 스물..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며 5분가량 영상을 보며 이어지는 스트레칭을 따라 한다.

뒷목이 조금은 가벼워진 거 같지만, 종소리의 긴 여운 같은 두통은 미세먼지처럼 작은 입자로 머릿속 구석구석에서 울린다.


그 뒤로도 몇 개의 영상을 더 따라 하다가 몰려오는 피로감에 잠들었다.


아침의 기척에 눈을 떴다.

창 밖은 어제와 같은 먹구름으로 가득했고, 내 머릿속도 어제와 같이 지끈 거렸다.  

따뜻한 물로 빠르게 샤워하고, 숟가락은 뜨는 둥 마는 둥 아침식사를 마친 후 출근길을 나섰다.

우산 들기조차 애매한 먼지 같은 빗방울이 우산에 부딪혔다.

전혀 타격감 없는 저항을 뚫고 집 앞 카페에 들렀다.

-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이요.

오늘 아침엔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어울릴 거 같은데.. 하는 마음보다 습관적인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먼저 입 밖으로 나갔다. 자의 반 자의 반?으로 주문하신 아메리카노를 받아 들고 빠르게 두세 모금 마셨다.  

1분 정도 지나자 방송이 들려온다.


'지난밤 내내 극심한 정체를 보였던 뒤통수 나들목은 오늘 아침 카페인의 수혈로 인해 다시 정상적인 흐름을 회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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