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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임 Feb 08. 2024

도세권 주민이 갑작스런 비에 대처하는 방법

나는 도세권에 산다.

집에서 도보로 5분도 안되는 거리에 시립 도서관이 있다.

대부분 도서관들이 교통이 불편한 외곽 혹은 높은 언덕에 위치해서 찾아가기 힘든 경우가 많지만, 우리 동네 도서관은 평평한 평지에 있다. 그래서 더 좋다.

하지만, 단점도 있다. 타 도서관에 비해 책이 많이 없다.

큰 도서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작은 도서관 책들 중에도 내가 읽은 책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니깐, 그 존재만으로도 기분이 좋고 안정감을 느낀다.

그냥 오다가다 생각나면 한 번씩 들러서 신간 코너 쭈~욱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나름의 재미가 있으니까.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종이책이 당기는 날. 종이책의 감촉이 그리운 날. 혹은 보고 싶은 책이 있지만 아직 전자책으로 출간되지 않은 책이 있을 때 별다른 어려움 없이 편안하게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어제는 조금 독특한 이유로 도서관엘 갔다.

집에서 쉬다가 뜬금없이 갑자기 로또가 사고 싶어졌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집 앞 카페에 가려고 준비를 마쳤는데 오늘이 토요일이고 저녁에 로또 추첨을 하는 날이라는 게 갑자기 의식이 되면서 오랜만에 로또나 사러 다녀올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옷을 챙겨 입고, 노트북을 챙기고, 전자책 리더기도 챙겨서 밖을 나섰다.

집 밖에 나온 지 몇 걸음 되지도 않았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진다. 폭우 수준은 아니지만 점점 피부에 부딪히는 물방울 무게와 속도가 증가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다행히도 내가 입고 나온 패딩엔 모자가 달려 있다. 나는 모자를 썼다. 모자를 섰는데 투투 투툭. 하는 제법 묵직한 소리가 들린다. 비가 이제 제대로 마음 먹고 내릴 건가 보다.

로또 판매점은 집에서 꽤 멀다.- 일반적인 시내버스 노선 기준으로 2코스 정도 걸어가야 한다. - 순간 망설임이 인다. 거기까지 다녀오면 비를 꽤 적실 텐데..

주위를 둘러본다.

마침 도서관을 막 지나는 중이다.

나는 망설임을 멈추고 도서관 안으로 들어간다. 망설임은 옷에 빗방울만 더 적실 뿐이니까. 로또는 다음 주에 사지 뭐.

입구에서 패딩에 묻은 빗방울들을 털어낸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따뜻한 히터의 흐름이 느껴진다.

건조한 히터는 내 옷에 묻은 빗방울들을 말려주고 내 패딩에 묻은 빗방울은 증발되면서 도서관 내부의 습도 조절에 도움이 되겠지. 나는 인간 가습기가 되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도서관 내의 건조한 공기를 적셔본다.

특별한 목적 없는 눈 쇼핑은 언제나 그 나름의 재미가 있다.

그 종착점은 언제나 신간 코너.

입구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의 큰 책장 두 개가 신간으로 가득 채워져있다.

아동용 책. 에세이. 소설, 정보, 자기 계발 그리고 그 분류가 애매한 책들이 사서의 기준으로 분류되어 가지런히 꽂혀있다.

나는 책장의 맨 위 칸부터 아래 칸까지 지그재그로 훑어본다.

새 책들이 들어온 지 얼마 안된건지, 아니면 오늘따라 반납된 책들이 많은 건지 오늘의 책장엔 빈틈이 거의 없다. 나는 꽉꽉 채워진 책장을 좋아한다. 서로 다른 작가와 다른 출판사, 다른 주제를 담은 책들끼리 옹기종기 붙어서 사람들의 손길을 기다리는 그 풍경이 좋다. 꽉꽉 채워진 책들을 쭈욱 훑다 보니 누군가가 꺼냈다가 억지로 밀어 넣는 바람에 머리가 튀어나와있고 옆의 책에 눌려서 표지가 볼록 구겨진 책이 보인다. 나는 그런 책을 만나면 일단 책장 밖으로 꺼낸다. 그리고 내용을 훑어보고 내가 원하는 책이면 집으로 데려가고, 아니라면 바로 옆에서 누르고 있던 책도 함께 꺼내서 두 권을 겹친 후 다시 책장에 살살 집어넣는다. 그렇게 둘이 꼭 붙어서 일정 시간을 함께 보내면 구겨질 뻔한 표지의 구김 자국은 짝지의 압력으로 다림질한 옷처럼 펴지기도 하니깐.

비록 지금은 내 선택을 받진 못했지만, 그 책을 꺼낼 누군가는 빳빳하게 펴진 새 책 같은 새 책을 빌려 가겠지. 깨진 유리창의 법칙은 미국 할렘가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물건이나 책도 마찬가지다. 새 책은 더 새 책처럼 곱게 다루고자 하는 마음이 클 거고, 구겨진 책은 이미 구겨진 거 막 대할 가능성이 더 커질 수 있다. '나는 안 그런대요?'라는 건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도서관의 책은 공공재니깐 불특정 다수의 손을 거친다. 그 수많은 사람이 당신과 같은 마음으로만 책을 대할 리는 없다. 그러니까 나와 함께 있을 동안은 책을 더 소중히 다뤄야 한다. 특히 도서관의 책들. 내가 소중히 다뤄야 이 책을 빌릴 다음 사람이 소중히 다를 확률이 더 높아지고 그만큼 책의 수명은 길어진다.


튀어나온 책의 표지를 바르게 펴주고, 다른 칸에 있던 책 두 권을 선택해서 대여했다.

에세이 한 권과 소설 한 권.

완독할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 비교적 두께가 얇은 책을 골랐다.

요즘 내 집중력의 농도로는 두꺼운 책은 무리다.

대여한 책들을 가방 깊숙한 곳에 밀어 넣고 도서관 입구로 나간다.

도서관을 들어올 때보다 더 많은 빗방울들이 바닥을 두드리고 있다.


만약 어젯밤 꿈에 조상님이 나타나서 로또번호를 점지해 줬다면, 나는 쏟아져는 폭우를 뚫고... 는 아니고, 집에 다시 들어가서 우산을 들고 다시 나오는 수고를 감수하겠지만, 지금 기억으론 어제 별다른 꿈을 꾼게 아닌거 같으므로 이 빗방울을 상대하면서 복권 판매점까지 가기엔 무리다.

역시나 이번 주 로또는 안되겠네.

5천원 굳었다.


플랜 B를 선택한다.

도서관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는 카페가 몇 군데 있다.

그 중에 한 곳을 정해 빠른 걸음으로 직진한다.

도서관에서 1분도 안되는 거리다.

키오스크를 통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서둘러 안으로 들어간다. 비 오는 날이라 카페에 사람들이 많을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한산하다.

카페 내부에는 중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아이들 몇 명이 카페에 앉아서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다. 의외의 풍경이다. 남자 중학생들만 카페에 앉아있는 풍경이라니. 새삼스레 카페라는 공간이 정말 많이 대중화되었구나 느낀다. 왠지 사춘기 남자아이들의 장소와 카페는 쉽게 매치가 되지 않는 선입견이 아직 남아있었다고 할까. 그런 의외의 풍경이라 신선하기까지 했다.

자리를 잡고 가방을 여는데 아이들의 대화가 간간히 들려온다. 아마도 현재 땡땡이중인 걸로 추측되는 내용이다. 학원 땡땡이의 정석은 피시방 아닌가? 음.. 장소는 카페지만, 각자 핸드폰으로 게임하고 있으니 어떤 의미에선 여기도 그들에겐 피시방과 같은 의미일까.

책을 막 꺼내려고 할때, '주문하신 아메리카노가 준비되었습니다.' 바리스타의 음성이 들린다. 픽업대에 준비된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휘적휘적 저으며 테이블로 돌아온다. 차가운 얼음과 잘 섞인 에스프레소 샷은 당연히 시원하고 맛있다. 추운 날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는 얼죽아의 이유는 차가운 피부와는 달리 속은 답답하기 때문이다. 많은 고민들과 결정해야 할 일들 그리고 그 이후에 더해질 여러 사건들의 연속성으로 꽉 막힌 세면대 같은 답답한 마음은 온전한 하루의 시간을 소화시키지 못한다.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꽉 막힌 세면대 같은 내 마음을 뚫어줄리 없겠지만, 그래도 열 정도는 식혀주는 효과 정도는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괜히 두 권을 빌렸나..

입안의 시원함이 다 가시기도 전에 어느 책을 먼저 읽을지 고민에 빠졌다.

에세이를 먼저 읽을까. 소설을 먼저 읽을까.

에세이는 처음 보는 작가의 책인데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빌렸다. 예전에 내가 혼자 끄적 거리던 글이 있었는데 그때 그 글의 제목이 이 책의 제목과 같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이 작가님은 나와 같은 제목 아래에 어떤 글들을 풀어냈을지. 또 다른 책은 작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의 책이다. 작년에 한 권밖에 못 읽어서 아쉬웠는데 마침 신간 코너에 있었다. 예상보다 얇은 두께도 부담 없어 보여 빌렸다.

자 그럼, 비 오는 날 카페에서 나의 선택은 두구두구두구!!

소설책이다.

하드커버.

그 촉감도 선정에 한몫했다. 지금 내가 원하는 촉감은 하드커버.

단단한 표지가 나무 테이블에 닿는 느낌이 좋다.


책은 초반부터 흥미를 끌었다.

출산을 앞둔 풍경의 묘사.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려고 한다. 아이의 아빠는 그 상황이 궁금하고 걱정된다. 하지만, 산파는 아이 아빠의 얼쩡거림을 경계한다. 일종의 미신 때문이다. 아무래도 예상하기 힘든 리스크가 큰 상황에 여러 미신들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출산도 마찬가지. 소설 속 배경이 요즘처럼 청결하고 전문적인 의료시설에서 이뤄지는 상황이 아니기에 더더욱 위험은 클 수밖에 없고 위험이 클수록 미신은 힘을 발휘한다.

진짜 출산을 앞둔 아내를 기다리는 남편의 심정을 그대로 담은듯한 묘사가 흥미로웠다. 흥미로웠지만, 깊게 빠져들진 못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요즘 내 집중력 수준이 이렇다.

갑자기 글이 쓰고 싶어졌다. 책의 머리에 달려있던 나일론 끈을 읽던 페이지 사이에 끼워 넣는다. 책은 잠시 옆으로 밀어놓고 노트북을 펼친다. 뭐 그렇다고 마땅히 엄청난 글감이 떠오른 건 아니지만. 꼭 엄청난 걸 해야 하나. 그냥 의식의 흐름이고 감촉의 흐름이다.



독서와 끄적임, 이 두 가지와 아메리카노는 찰떡궁합이다.

통유리 창이 있는 카페라면 거기에 멍 때림도 추가되겠지만..

비 오는 날 빗방울 소리 튕기는 처마 아래 카페였다면 더 바랄 게 없었을 거다. 그런 곳이라면 계속 주문하면서 반나절은 그냥 보낼 수 있을 거 같지만.. 오늘 같은 날은 웨이팅 장난 아니겠지. 나만 그런 자리를 원하는 건 아닐테니깐. 특히 창가 자리는 더더욱 차지하기 힘들 테고.

현실은 비록 비 오는 날 통유리와는 거리가 먼 평범한 동네 카페 구석 자리. 풍경이라고는 똥폼 잡는 모습이 아직은 귀여워 보이는 남학생들이 전부이긴하지만, 딱히 나쁘진 않다. 덕분에 내 글은 9부 능선을 넘어서 완성의 고지에 다다랐으니까.

이제 흥미로웠던 풍경들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두명이 같이 앉아 있었고 한 명은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길래 다른 일행인 줄 알았는데, 나갈 때 보니 친구관계인 거 같네. 왜 따로 앉았지? 4명이 앉는 테이블도 비어있었는데?

그들은 내 궁금증을 채워주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카페에 손님은 이제 나밖에 없다.

이제 슬슬 나도 일어나야지.

얼음과 함께 가득 담겨있던 아메리카노의 갈색이 모두 사라졌고, 내 집중력의 밑천 또한 바닥이났다.

갑작스레 내린 비 때문에 로또를 구입하진 못했지만, 갑작스레 내린 비 덕분에 도서관의 신간 코너처럼 내 시간의 책장도 알차게 채워진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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