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저녁이었다. 한 여름의 장마. 버스를 타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나는 차 창에 기대어 무심한 시선으로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 창 밖에는 어두운 도로를 달리는 차들과 간판들이 저마다의 빛을 내고 있었다. 하지만, 빛은 쏟아지는 빗물 속에 번져 힘없이 스러져버렸다.
나는 눈길을 돌렸다. 버스 안은 한적했다. 겨우 손님 몇 명이 있었다. 우측 대각선에 앉아 있는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눈에 띄었다. 어깨를 살짝 덮은 긴 머리와 갸름한 턱선, 매끈한 콧날과 통통한 볼을 가진 여자. 하얀 원피스 아래 스니커즈 운동화가 보였다. 하얀색. 깨끗하고 단순한. 가슴이 두근거렸다.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나는 무의식 중에 고개를 숙여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끼익, 버스가 정류장에 미끄러져 들어갔다. 내려야 했다. 내 앞에 그녀가 서 있었다. 같은 곳에서 내리다니. 초여름의 하얀 장미, 장미향이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버스는 제 갈길을 가버렸다. 억수 같은 비가 정류장의 가림막 안까지 들이쳤다. 나는 급히 우산을 펴 들었다. 그런데, 그런데, 여자가 나를 돌아보며 말을 걸었다.
"저기, 우산 좀 씌워줄 수 있어요? 저는 이쪽으로 가거든요."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검은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약간은 떨리는 검은 눈동자. 그녀는 우산이 없었다. 이렇게 비가 오는 데 도대체 왜.
"..."
"..."
"어, 저는 방향이 이쪽인데 예. 저, 집에 가야 돼서... 안녕히 가세요."
아, 무심코, 정말 무심코 말이 나와버렸다. 그리고 나는 인사를 꾸벅하고 돌아섰다. 비 맞을 텐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발걸음은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늦은 저녁, 나는 배가 고팠다.
그다음 날, 나는 친구의 자취방에서 뒹굴거리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함께 모인 친구들 모두 입에 담배를 물고, 푸푸 거리며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친구들에게 전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병신 같은 새끼~"
"야, 이 등신아, 바보 같은 새끼.."
나는 욕을 먹었다. 우리는 낄낄거리며 방바닥을 뒹굴었다. 구석에는 재떨이를 대신하고 있는 소주병과 먹다 남은 새우깡, 참치캔이 널브러져 있었다. 자취방 주인 놈이 소주병을 들고 재를 털었다. 그리고 칵, 칵하며 걸쭉하게 가래를 올려내어 쭈욱 뱉었다. 더러운 놈이었다. 날이면 날마다 술을 마셔대서 늘 얼굴이 부어있었고 온 몸에 담배냄새가 배어 있던 녀석. 몇 일째 면도를 안 했는지 몇 가닥 안 되는 털이 턱을 지저분하게 비집고 나와 있었다. 개기름이 흘렀다.
우리는 그 시절,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낄낄거리며, 담배나 피고 술이나 먹던 놈팽이였다.
세월은 놈팽이들을 그냥 두지 않았다. 친구들은 하나 둘 군에 갔다. 나는 군에 가기 싫어 연기를 몇 번 했지만, 결국에는 입대를 했다. 그런데 자취방 주인이었던, 그놈은 군에 가질 않았다. 아버지 없는 3대 독자. 그 정도면 면제 사유였다. 그런데, 군에 간 친구들이 하나 둘 제대하고 졸업을 한 후에도 이 놈은 학교를 다녔다. 4년 다니면 졸업할 학교를 8년을 넘게 다녔다. 힘겹게 졸업을 한 친구와 나는 나란히 취업 시장에 뛰어들었다. 시간이나 죽이던 놈들이 취직이 될까. 거기에 IMF까지 와버렸으니. 우리는 IMF만 없으면 취직이 잘 됐을 거라고, 위안하며 살았다. 방을 뒹굴며, 담배를 피우면서.
시간은 우리를 어떻게든 변화시켰다. 그 녀석도, 나도, 그리고 다른 친구들도 모두 취직을 했다. 친구들 중에는 신문기자, 학교 선생이 된 놈들이 있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그놈들이, 뭘 망치려고. 그런데, 그 녀석은 스님이 되었다. 도대체 이해가 되질 않았다. 결국 빠박이 땡중이 된 친구를 찾아갔다.
"뭐꼬? 도대체 유예 된 기고?"
"아, 그기.. 내가 회사를 취직만 하면 망하고, 취직만 하면 망하고.. 캐서"
"근데?"
"응, 네 번째 회산가? 그기도 망해 뿌가.. 엄마가 사는 절에 갔지. 근데, 주지스님이 절 물려주겠다고.. 절에 들 오라 캐서.."
"뭐? 절을 물리 줘?"
"어, 고민 많이 했지. 장가도 못 가고.. 씨, 그런데, 그냥 산에 사는 게 낫겠다.. 싶더라. 회사도 자꾸 망하고.."
"..."
"..."
"야, 친구, 나 그 밑에 주차장 좀 해도 되제?"
"낄낄.. 이기, 미칬나. 일이나 열심히 해라.."
나는 친구가 스님이 되겠다는 이야기를 전화로 듣고 눈물을 흘렸었다. 그런데, 전후 사정을 들은 후에는 주차장이 하고 싶어 졌다. 그렇게 그 빠박이 땡중은 속세를 떠나버렸다. 내가 좋아하던 친구가 그렇게 가버렸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절로 들어간 지, 벌써 20년. 다시 장마가 왔다. 억수같이 비가 내리는 저녁, 창 밖을 바라본다. 빗 속의 나를 본다. 이성보다 동성 친구를 더 좋아했던 스무 살의 어린 대학생. 그 시절, 나와 함께 방을 뒹굴며 담배를 피워대며 시간을 죽이던 친구들. 그리고 지금은 빠박이 땡중이 된 친구를 떠올린다.
시간을 이길 수만 있다면, 그 시절의 놈팽이들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