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회사에서 마지막 월급을 받았다. 퇴사를 결심한 후 퇴사를 행동에 옮기기까지 8개월 25일이 걸렸다. 아, 이렇게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정감이 떨어지는 데, 20년 이상 몸 담은 IT 서비스 업계의 직업병이라 어쩔 수 없다. 이해해 주시길..
월급날이면 누군가는 집에서 가족과 치킨을 먹고, 누군가는 동료들과 맥주를 마신다. 물론 세금이 왕창 빠진 회사원의 유리지갑을 노리는 무리들이 각종 공과금과 카드값, 이자, 학원비 등을 바로 가져가 버려서, 겨우 적금 조금 넣을 정도 거나 혹은.. 마이너스가 되는 경우가 많다. 마이너스 통장을 보며 '이놈의 월급쟁이..'라고 하소연하겠지만, 그래도 매달 꼬박꼬박 돈이 들어오는 월급날만큼은 기분이 좋다. 그런데, 나는 이제, 월급을 받을 곳이 없어졌다.
오~ 마이 갓, 지저스...
나는 이 회사에 14년 6개월을 다녔다. 경력사원으로 입사할 때, '3년 정도 다니겠지'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쁘게 돌아가는 프로젝트는 워낙 사건사고가 많아 지겹지 않았고, 또 너무 바빠서 다른 회사를 찾아볼 여유도 없었다. 힘든 일들을 함께 하고, 같이 밥을 먹고 술을 마시며 놀던 좋은 동료들이 있었던 것도 오래 회사를 다닐 수 있었던 힘이었다.
물론 어려운 시기도 많았다. 연봉이 동결되거나 힘든 프로젝트에서 낮, 밤,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죽도록 일만 했던 시간도 있다. 일명 꼰대 상사와 떠먹여 주길 원하는 고객의 온갖 갑질도 있었다. (돌이켜 보면.. 참..) 이런 다양한 어려움을 이겨내고 15년을 다녔지만..
나는 결국 퇴사를 선택했다. 그것도 사십을 훌쩍 넘어선 2020년 추석을 앞둔 9월 월급날에..
이쯤에서 "왜 회사를 그만뒀데?"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서..
19년 나는 회사의 임원이었다. 나는 팀장 1년 차를 마치고 임원이 됐다.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초고속 승진이었지만 1년 만에 보직 해임을 당했다. 온갖 정치적 이슈들을 에너지로 사용하며 달린 롤러코스터 같은 임원의 생활이었다. 하루 9개가 넘는 회의와 보고, 살아남으려는 자들의 자리보전 싸움, 행여 잘 못된 일이 있으면 어떻게된 책임을 피하려는 눈치 싸움들. 나는 그런 정치적 이슈들을 이겨낼 만큼 경험도 힘도 없었다.
임원으로 생활하며 받았던 스트레스도 힘들었지만, 갑작스러운 보직 해임은 길을 걷다 자동차에 '쾅!'하고 받힌 정도로 마음에 상처를 남겼다. 자동차 사고로 다리에 깁스를 하거나 머리에 붕대를 하고 다니면 다들 애처로워하지만, 마음에 남은 상처는 이해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야! 그냥 다녀~ 그래도 안정적인 회사에 좋은 대우를 해주잖아?"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래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나 스스로에게 다른 질문을 던졌다. 아니 어쩌면, 내가 던진 질문이 아니라 인생이, 삶이 내게 던진 질문이리라.
"내 인생의 운전대를 다른 이에게 맡겨도 될까?"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나는 명상을 하고, 글을 쓰고 책을 읽었다. 오랜 시간 고민하며 '임원에서 보직 해임을 당한 것'은 하나의 사건일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즉 나의 욕망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점이다. 나는 남이 하자는 데로, 사회가 원하는 데로 살아왔다. 회사가 정해준 프로젝트에 들어가고, 고객이 원하는 업무를 했다. 회사 지향하는 인재상, 사회 트렌드를 따라가는 사람이 되고자 했다. 정작 나는 누구인지도,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이런 성찰을 통해서 내린 나의 결론은, '운전대를 남에게 맡기면 안. 된. 다!'였다. 사람들은 다른 이가 운전을 하는 차에 타면 멀미를 한다. 동승한 사람은 좌회전을 할지, 우회전을 할지, 속도는 얼마를 낼지, 앞에 어떤 돌발상황이 생길지에 대해서 아무런 고민이 필요 없다. 운전대를 남에게 맡겼으니 당연히 예측할 수 없다. 편하지만 멀미가 나는 이유다. 그리고 가끔 어떤 운전자는 "여기 내려!" 한다. 어딘지도 모르는 도로에.
내 인생의 주도권을 되찾고 싶어서 나는 결국 퇴사를 선택했다. 오래 몸담은 조직을 떠나 홀로 서야한다는 불안과 잘못 되면 어쩌나하는 두려움을 이겨내야 했다. 또, 소속 및 인사 조직과 줄다리기도 해야했다. 소리 소문 없이 진행된 퇴사 때문에, 동료들은 나의 퇴사 소식을 듣고 다음 행선지를 궁금해한다.
"좋은 데 가면 나도 좀..", "설마? 어디 가시는 지 정해놨죠?", "곧 좋은데 생기겠죠.."
뭐, 이런 말들을 하지만.. 나는 아직 내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겠다. 하나의 문은 닫았지만, 아직 다른 문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창업이나 재취업, 프리랜서의 삶을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갈 곳을 정하지 않고 회사를 그만둔 나를 보고 걱정을 하는 이들이 많다.
"야, 두 다리 다 떼면 어떻게 하냐? 한 다리 걸치고 다른 곳을 찾아야지.."
입만 떼면 욕을 하는 목표지향주의 선배 임원이 한 말이다. 일만 같이 안 하면 참 좋은 사람이긴 한데.. 뭐, 어쨌든 그렇다. 그래, 나도 불안하다. 다른 문이 제대로 안 열릴까 봐. 어쩌면, 내 인생의 주도권을 찾는 것은.. 빌려준 돈 받는 것보다 어려울 지도.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라고 하는 시끄러운 소리들과 각종 미디어에서 쏟아내는 소위 말해 잘 나가는 사람들, 멋진 자동차와 비싼 아파트에 사는 이들을 보면 "너도 그렇게 살아야지? 그냥 돈이나 많이 벌어!" 하고 나의 에고가 소리를 친다.
그러나, 그래도, 나는 '운명이라는 이름의 황소'에 끌려다니고 싶지 않다. 또한, '행운의 여신은.. 아무리 화가 나도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충분히 내려준다'는 세네카의 말을 믿는다.
나는 요즘 나의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엄청나게 많이 변했다고 느낀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어떻게든 있는 것을 지키고 안정적으로 살기를 원했는데. 내가 이렇게 변하다니. 나는 이런 변화의 과정을, 내 인생의 운전대를 스스로 잡겠다, 고 결심하기 까지의 과정을 글로 남기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