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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신 Oct 10. 2020

떠나다. 새로운 땅으로

변화가 다가오면, (#3) 

(앞의 글을 먼저 읽으면 좋아요. )

https://brunch.co.kr/@desunny/58


시간은 참 정직하다. 절대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갈 뿐이다. 그 걸음에 하루가 가고, 한 달이 가고 계절이 바뀐다. 그리고 한 해가 간다. 


10월이 되면서, 방에서 아침 명상을 하고 있다. 9월 만해도, 베란다에서 아침 명상을 했는데, 불과 몇 일 만에 추운 날씨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에 하는 명상은 맑은 정신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루하루가 알차다. 이런 규칙적인 생활은 나를 심리적으로 편안하게 만든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피곤에 절은 충혈된 눈으로 우울하게 다녔고 얼굴이 푸석푸석했는데, 요즘은  피부가 좋아지고 얼굴이 편안해 보인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심지어, 마음이 편안해지니 탈모도 완화되었다. 이놈의 탈모 때문에 약을 얼마나 먹었던지. 


앞선 글에서도 언급한 내용이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나는 치열한 회사 생활을 했다. 먹고사는 것은 전쟁, 세상은 위험한 곳이라는 마음때문이었을까? 나는 안정적인 직장을 원했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다르다. 안정적인 직장보다는 자유로운 시간을 원한다. 내 시간을 내가 사용하면서, 내 에너지를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쏟고 싶다. 


나는 명상을 하면서 내게 일어난 변화들을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중심을 잡았다. 그리고 외부의 영향에 덜 흔들리기 위해서 꾸준히 명상을 하고 있다. 


작년, 그러니까 19년 12월 3일, 나는 전북 진안의 위파사나 명상센터에 들어갔다. 임원에서 해임을 당한 후, 약 일주일 만이었다. 하늘의 뜻인 것인지.. 아주 운이 좋았다. 취소한 사람이 있어서 몇 개월씩 대기해야만 하는 자리에 바로 들어갈 수 있었으니. 


나는 서울역에서 이른 아침 KTX를 타고 전주로 떠났다. 손을 흔드는 아내의 모습을 차창 밖으로 바라보면서, 마침내 홀로 남았다는 것을 알았다. 밀려오는 씁쓸함과 외로움에 눈가가 촉촉해졌다. 혼자하는 여행은, 특히 아픔을 품었을 때는, 가슴 속에서 무언가 외로움이라는 걸 진하게 일으키는 것 같다. 그럴 때는, 차창 너머 풍경을 바라봐야 한다. 그저 눈을 감고 잠을 잘 수도 있지만, 마음에서 일어나는 외로움은 어딘가로 시선을 돌리게 만든다. 


차 창 밖에는, 어릴 적 기억하던 기차길 옆 풍경과는 달리 아파트와 공장과 도로와 자동차와 또 아파트와 공장과 도로가 펼쳐지고, 또 아파트와 공장과 도로가 펼쳐지는 풍경이 천안 까지 이어졌다. 일직선으로 달리는 KTX 철로 주변은 모두 개발이 이루어져 고즈넉한 풍경의 들판을 보기 어려웠다. 옛날 새마을이나 무궁화호를 탈때는 넓게 펼쳐진 들판과 산, 강물을 볼 수 있었다. 특히, 비둘기호라는 것이 내가 대학생 때만 해도 있었는데, 일명 완행열차인 비둘기호에는 특별한 장소가 있었다. 기차의 마지막 칸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식으로 말하자면, 꼬리칸이다. 이 꼬리칸은 뒤가 뚫려 있어서 달리는 기차의 바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꼬리칸에서 맞는 바람은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형형색색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어떤 때는 외로움을, 또 어떤 때는 슬픔 그리고 사랑을 품고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모두 자유로움이라는 해방의 마음이었다.


이런 상념에 빠져있을 때 KTX는 전주역에 도착했다. 전주역에 도착하여 센터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지 못하고 택시를 탔다. 띄엄띄엄 있는 버스를 기다릴 수 있는 마음의 여유 조차 없었다. 덕분에 빨리 도착하긴 했지만, 시골의 경계를 넘어서는 택시비는 서울보다 높다는 걸 알았다. 네이버 지도는 그저 대도시를 기준으로 택시비를 예상하는 한계가 있었다. 뭐, 어쨋든 나는 센터에 빨리 도착하여 이른 접수를 마치고 배정받은 방에 짐을 빨리 풀 수 있었다. 


센터 곳곳에 붙어있는 "위대한 침묵" 이라는 문구를 보며 나는 드디어, 새로운 땅에 도착했음을 실감했다. 열흘 간 말을 할 수 없고,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명상 센터의 규율이 주는 엄숙함, 진지함, 비장함을 느꼈다. 그 느낌이란.. 마치, 순례자들의 길이 주는 그런 느낌이었다. 


'과연 열흘간 말을 하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


대학을 다닐 때, 말이 정말 없었던 친구가 있다. 경상도 출신의 남자들은 특히 말이 없는 경우가 많은데, 이 친구가 그랬다. 가끔은 '입에 곰팡이가 피지 않을까?'하는 걱정을 했었으니. 나도 열흘 간은 그 친구처럼 말을 끊어야 한다는 생각에 걱정이 일면서도, 예의를 차려가며 마음에 없는 말을 하고 다른 이를 사귀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한편으로는 편안한 마음이 생겼다. 


짐을 정리한 후, 커다란 느티나무가 앙상한 가지를 드리운 마당을 거닐었다. 머리에는 쥐색 비니를 쓰고 말없이 마당에서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길 때, 차갑고 맑은 공기가 두 콧구멍을 뚫고 가슴 속으로 들어왔다. 


'아, 이 편안함이라니.. 이곳에 오길 잘 했다. 계속 서울에 있었으면, 어쩌면 미쳐버리고 말았을 것인데..' 


비염이 심해 늘 막혀있던 왼쪽 콧구멍으로 바람이 들어오는 순간에,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맑은 공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곳 센터가 풍기는 정서적 안정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양쪽 코로 숨을 쉬는 순간, 그간 힘들었던 모든 것들을 잊을 수 있을 정도로 편안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첫 날에는 내일 부터 이어질 명상 프로그램에 대한 소개와 숙소 및 식당, 명상관에서 지켜야할 사항들을 안내했다. 그리고 명상을 어떻게 하면 되는지에 대한 가이드도 있었다. 가이드는 글로벌 위파사나 명상 센터의 설립자(?)인 고엔카 선생의 비디오 영상으로 이루어졌다. 영상을 틀자, 고엔카 선생과 그의 아내로 보이는 분이 나왔다.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되신 분들이지만, 그들은 아직도 영상 속에서,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살아있었을 뿐 아니라 여전히 선한 영향력을 강하게 미치고 있었다. 


고로에 접어든 여인은 연설하고 있는 남편 옆에서 지겨운 듯 얼굴을 긁고 있었다. '이 양반 또 길게 말한다'는 여인의 마음이 느껴질 때 즈음하여 안내는 끝이 났다. 밖에는 어느새 해거름이 내려오고 있었고, 센터에 들어온 50여 명의 남, 여 명상가들은 남여가 구분된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우리는 모두 한 방향을 보고 정해진 자신의 자리에서 말없이 저녁을 먹었다. 간소한 밥과 국, 채식 반찬, 과일 한 조각.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충분한 밥상을 깨끗이 비우고 스스로 먹은 식판을 깨끗이 씻었다. 


나는 도시의 화려한 식당에서 먹던 그 푸짐한 밥상이 불러오던 포만감과는 다른 어떤 만족감에 빠져 정원을 산책했다. 남자 숙소를 끼고 마치 탑을 돌듯이 한 방향으로 몇 차례 돌았는데, 직업병이라는 건 참 무시 못한다. 어느새 한 바퀴가 300발자국이고 보폭이 90정도 되니, 몇 백미터를 돌았는지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걸 느꼈을 때, 도대체 나라는 인간은 왜 이런 것인지, 하는 마음이 일었고 동시에 우울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서울에 있는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이 다시 떠올라 나의 마음을 짓눌렀다. 


도대체, 나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나.


이런 생각이 들 즈음에 명상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안내에 따라 명상홀에 정해진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홀 안은 낮은 조도의 등이 사람의 얼굴을 겨우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띄엄띄엄 켜져있었다. 나는 이미 앉아서 명상을 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 눈을 감았다. 그리고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 영어다. 네팔에서 한국으로 건너 온, 명상 수행 법사였다. 작은 체구에 하얀 옷을 입고 있는 마음 좋아 보이는 할아버지다. 


그는 앞자리에 앉아 고엔카 선생의 명상 가이드가 녹음된 영상을 틀었다. 고엔카 선생은 앉아서 눈을 감고 콧구멍에 집중하고 생각이 올라오면 알아차리고 다시 콧구멍에 집중하라고 했다. 우리는 8시 부터 9시까지 짧은 명상을 하고 숙소로 이동했다. 취짐 시간은 10시였지만 나는 잠을 자지 못했다. 머리 속에서 온갖 상념들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으니 잠이 올 턱이 없었다. 


침대에 누운 나의 머리 속에는, 해임을 당할 때 있었던 일들과 말, 1년 동안에 있었던 사건, 사고들이 주마등 처럼 스켜지나가며, 온갖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일어났다. 십년이 넘는 시간동안 쌓아왔던 나의 모습, 나의 경력, 나의 이름이 더럽혀진 듯한 느낌, 계획하던 인생의 방향이 확 틀어져 버린 느낌, 그런 느낌들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급기야 내 머리 속에는 이런 생각과 그런 생각들이 불러온 분노와 좌절의 감정이 가득차 버렸다. 그렇게 비몽사몽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기상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고, 힘겹게 일어나 간단히 채비를 마치고 사람들 틈에 섞여 숙소 밖으로 나갔다. 


아직은 어두운 새벽. "꼬끼오" 하고, 멀리서 닭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고, 새벽 하늘에는 아직도 별이 밝았다. 그날 그 새벽의 별을 바라보며, 앞으로 열흘을 어떻게 보낼 것이며 내 마음속에 있는 분노와 좌절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를 고민했다. 솔직히, 그것이 가능할지 몰랐다. 그러나, 시간은 정직했다. 시간은, 뒤돌아 보지 않고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나도 그것에 보조를 맞추어 하나하나 몸으로 부딪혀 나갔다. 시간은 정직하기 때문에 정말, 위대하다.


※ 이미지 출처 

Eugene Shelestov 님의 사진, 출처: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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