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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신 Oct 11. 2020

외로움은 그리움

누구나 플라타너스를 키운다

https://brunch.co.kr/@desunny/53

(앞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벚꽃이 언제 날렸는지도 모르는 데, 여름이 왔다.


대갈과 나는 대구의 지독한 여름에 혀를 내두르며, 좁아터진 사글셋 방에 선풍기 한 대를 들여놓았다. 공장에서 야간 밤샘 작업을 한 날에는 아침 한나절이 지나면 더위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대구의 더위는 작게 뚫려 있는 창문으로 겨우 들어오는 바람과 하루 종일 힘겹게 도는 선풍기 한대에 의지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었다. 그런 날이면 나는 오후 두 시 정도에 잠에서 깨어났고, 멍청하게 앉아서 눈을 뜨고 졸고 있으면 한 시간 정도 후에 대갈이 일어났다. 당시 우리는 아침이라고 해야 할지, 저녁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밥을 먹고 다시 공장에 출근하는 똑같은 생활을 반복했다.


이른 봄부터 이어진 주야 2교대 공장 생활 때문인지, 나는 몸이 점점 안 좋아졌다. 멍하게 앉아 있기 일수였고, 감기에 자주 걸렸다. 감기는 늘, 편도선을 동반해서 왔다. 목이 퉁퉁 부워  기침을 하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열이 올랐고 이비인후과에 가서 엉덩이 주사를 맞고 한 삼일 정도를 앓아야지만 겨우 나았다. 이런 나와는 달리 대갈은 별 탈 없이 건강했다. 하긴 나와는 달리 남는 게 힘 밖에 없는 튼튼한 대갈이었으니.


어느 날 아침, 아니.. 오후. 잠에서 깨면 아침인지 오후 인지도 헷갈렸다. 젠장. 어쨌든, 잠에서 깨어나서 멍청하게 앉아 있을 때였다. 꿈인지 생신지 모를 때, "야! 공부해." 하는 말이 들렸다. 그 말에 눈을 뜨고 멍하니 문지방에 걸터앉아서, 공부를 해야 할까, 생각하고 있을 때.. 대갈이 다시 말했다.


"야! 야 인마! 또옹수, 니는 고마 공부해라"

"응? 뭐라카노? 공부를 하라고?"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대갈에게 물었다.

"그래, 니는 공부해서 고마 대학을 가라. 일하는 거 보이, 안 되겠더라.."


대갈 말을 듣는 순간, '에이 씨, 나를 무시하나?' 하는 마음이 올라왔지만 대갈의 말이 맞기도 하거니와, 괜히 댓거리를 할 만큼 힘도 없어 가만히 있었다. 하긴 내가 힘은 약해도, 대갈보다는 훠얼~씬더 공부를 잘했으니, 나도 대학이라는 곳을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내가 공장을 그만둔 것은 8월 월급날이었다. 돈을 아껴 중고로 장만한 14인치 컬러 TV의 채널을 돌리기만 하면 중국과 우리나라가 수교를 했다는 뉴스가 나오던 날이었다. 중국과 수교를 했다는 게 무슨 말인지 잘 이해를 하지는 못했다. 가끔 사람들은 중공이라고 하기도 하고, 중국이라고 하기도 했다. 대만이 한중 수교에 대해서 우려를 표한다는 뉴스도 나왔다. 알아듣지도 못할 말들을 너무 많이 지껄여서 TV를 괜히 들여놓았나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대갈이 일하러 가고 없을 때도 사람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나는 집에 하나밖에 없는 밥상 위에 대구역 지하도 헌 책방에서 사 온 교과서와 문제집을 펼치고 공부를 시작했다. 오랜만에 펼친 교과서와 문제집 때문이었을까? 글자를 볼 때마다 그것들이 표창처럼 날아와 머릿속에 박혔다. 나는 밤샘 근무할 때 졸다 걸려, 반장 아저씨에게 혼나지 않아도 된 것만으로도 기분이 너무 좋았다. 그런데, 심지어 대갈은 공부하는 나를 위해 가끔 통닭이라는 것을 하얀 종이 봉지에 담아서 가지고 오기도 했다. 대갈은 통닭에 소주를 마셨다. 한 잔 달라는 내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공부나 하라는 말을 날리긴 했지만, 통닭을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여 글자들이 더 머리에 잘 박혔고 숫자들만 보면 계산이 되는 듯했다. 


그렇게 집안에만 틀어박혀 공부를 하는 사이 대갈은 어느새 두툼한 회색 잠바를 입고 다니고 있었다. 그즈음, 나는 대구에 있는 국립 K대학교에 원서를 넣었다. 서울이라는 곳을 가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돈도 없었고 대갈과 헤어져 살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물론, 대갈도 내가 없으면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긴 했다. 이런 나의 생각에 아랑곳없이 대갈은 주야 2교대 근무에도 점점 더 튼튼해져 갔다. 집에만 돌아오면 팔 굽혀 펴기에 윗몸일으키기를 한 백개씩 정도는 하고, 하얀 입김이 나오는 날에도 세숫대야에 찬물을 받아 목욕을 하곤 했다. 그리고 주야 교대가 일어나는 일요일이면 혼자 멋을 내며 외출을 하곤 했다. 멋 같은 건 낼 필요가 없는 외모라는 걸 알면서도 멋을 내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에 누굴 만나러 가는 건지... 궁금했지만, 나는 공부에 전념했다. 꾸며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대갈이 곧 알겠지,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코 앞에 학력고사가 다가왔기 때문에 다른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기도 했다. 


드디어 12월이 왔다. 뜨거웠던 여름만큼, 대구의 겨울도 혹독했다. 학력고사가 있던 날, 나는 차가운 바람을 뚫고 K대 후문을 따라 시험장으로 걸어갔다. 아줌마들이 교문에 엿을 붙이고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파이팅을 외치고 있었다. 그 사이를 뚫고 가는 게, 좀 쪽팔렸지만.. 나는 나를 위해 엿을 붙이고 파이팅을 외치는 거라는 착각을 하며 교문에 들어섰다. 교정에는 플라타너스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라 있었다. 나는 앙상한 가지에 간혹 매달린 나뭇잎을 보며 엄마가 나를 두고 떠나던 날을 떠올렸다. 엄마는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힘들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데 어떻게 한 번도 나를 찾아오지 않을 수 있지, 하는 생각을 하며 아름드리 플라타너스 나무가 늘어서 있는 교정을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얼굴도 잘 떠오르지 않는 엄마에게 빌었다. 잘하게 해 달라고.


시험시간은 금세 지났다. 의자를 책상 밑으로 밀어 넣고 시험장에서 나오는 순간에 그간 공부했던 것들, 그리고 시험 문제들을 모두 잊어먹었다. 시험 문제가 어쨌다는 둥, 잘 본 것 같다는 둥 지껄이며 지나가는 아이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외치는 "가답안지 팔아요"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눈길 조차 주지 않고 후문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날 대갈과 나는 해방의 통닭을 먹었다. 두꺼비가 그려진 금복주도 한 병씩 나누어 먹었다.


시험이 끝난 후, 며칠간은 여유롭지만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일하러 나가는 대갈을 위해 밥을 차려주고, 다시 돌아오는 대갈을 위해 라면을 끓였다. 사람들 목소리라도 들으려면 TV를 틀어놔야 하는 데,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조금씩 지겨워졌다. 뭔가 할 일이 없을까, 궁리를 하던 차에 집 앞에 있는 당구장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약간 깡패 같은 친구들이 들락거리긴 했지만, 집도 가까웠고 무엇보다 대학이라는 곳을 들어가면 당구 정도는 쳐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나는 공과 당구대를 닦고, 바닥을 쓸고 화장실을 청소하는 사이사이에 그곳 죽돌이 형들에게 당구와 담배를 배웠다. 죽돌이 형 중에 한 명이, 어느 날 담배 두 개를 입에 척 물더니 불을 붙였다. 흡사 영웅본색에 나오는 주윤발처럼 고개를 좌로 촥! 돌려서 한 모금 쓰윽 빤 후에 나한테 건넸다. 


"담배는 피울 줄 알재?" 나는 주저하며 받아서 빨아 당겼다. 캑캑 거리며, 기침을 했지만 담배 연기로 빼곡한 당구장에서 오래 있어서인지, 아니면 멋있게 보여서인지 금세 담배가 좋아졌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당구공이 흘러 다니는 길이 보이고 담배가 좀 늘어서 기침이 나오지 않을 때쯤, 합격자 발표날이 왔다. 나는 공중전화로 합격자 발표 ARS에 전화를 했다.


합격! 나는 공중전화 부스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예이~!" 하고 소리를 질렀다. 줄을 서고 있던 뽀글이 머리 아줌마가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를 지르고 대갈이 일하는 공장에 전화를 했다. 대갈도 좋아서 소리를 질렀다. 아, 그 기분이란.. 옛날 영수와 딱지 따먹기를 해서 한꺼 번에 50장을 땄을 때 이후로 처음 느끼는 상쾌함이었다. 


나는 그렇게 K대 중국어과에 입학했다. 나는 그간 모아놓은 돈과 당구장에서 받은 월급 10만 원을 합쳐서 등록금을 냈고, 당구장 아르바이트는 그만두었다. 그렇게, 나의 대학생활은 시작되었다. 나는 내가 엄마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고아라는 것을 숨기고 다녔다. 맛있는 술을 척척 사주는 선배들과 예쁘게 생긴 여자 동기들, 그리고 몇 명 안되어 똘똘 뭉치고 다니던 남자 동기들에게 그 사실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나의 비밀을 말하면 이들에게서 멀어질 것만 같았다.


이들과 어울려 다니며, 그간 모아 두었던 돈을 다 쓸 때쯤에서야 나는 겨우 당구장 아르바이트를 다시 시작했다. 당장의 용돈도 부족했지만, 다음 학기 등록금도 준비해야 하는 처지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 일하며 공부하는 것이 힘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주야 2교대로 일하던 공장 정도는 아니었다. 뭐, 사실 거의 공부를 안 하기도 했지만.


시간은 빨리 흘렀다. 다시 가만히 있었도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대구의 여름이 왔다.


그 해 여름, 나는 과의 동기들과 함께 MT를 갔다. 다니던 당구장에 이틀 휴가를 냈다. 우리는 대구역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하얀 백사장이 넓게 펼쳐진 부산의 해운대에 도착했다. 백사장 끄트머리에 텐트를 치고 함께 간 남녀 동기들과 물놀이를 하고 저녁을 해 먹었다. 그리고 한잔 두 잔 술을 먹었다. 얼마나 술을 먹었는지도 몰랐다. 술을 마시던 중에, 나의 대각선 맞은편에서 훌쩍훌쩍 울고 있는 여자 아이가 있었다. 술 취하면 꼭 우는 애들이 있지, 하는 생각으로 계속 술을 마셨다. 몇몇 아이가 달래주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술이 취해 비틀거리며,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뭐꼬, 와? 와 우는데?"

"아이다, 고마 니는 신경 꺼라." 우는 아이를 달래주던, 그 아이의 단짝 친구가 말했다. 나는 슬며시 기분이 나빴지만, 술 취해 우는 애들이랑 무슨 댓거리를 할까 하는 마음으로 내 자리로 돌아가려 등을 돌렸는데, 그 옆에 있던 다른 아이가 내 어깨를 슬며시 짚더니 내 귀에 살짝 말을 했다. 


"야, 쟈 엄마 아빠 사이가 안 좋아가 이혼한다 카네.. 고마 모른척 해라." 


그 말이 내 귓속으로 깊게 빨려 들어오며, 내 처지를 떠올리게 했다. 아빠는 돌아가시고, 엄마는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내가 스스로 불쌍해졌다. 그리고 이기지도 못하는 술을 들이켰다. 얼마나 술을 마셨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재수를 해서 나와 동갑인 남자 동기와 멱살을 잡고 있었다. 아이들은 뜯어말리고 있었고, 나와 동기는 서로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뜯어말리는 힘을 못 이겨, 나는 비틀거리며 백사장에 앉아 술을 또 퍼부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백사장에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침이었다.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엄마 이야기가 나온 거 같고, 동기 녀석이 뭐라고 비아냥 거렸던 거 같다. 그리고, 주먹다짐이 있었고.. 젠장. 기억이 나질 않았다. 


MT에서 돌아온 나는 동기들이 예전 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동기들이 연락을 해서 만나자고 해도, 괜히 바쁘다고 핑계를 댔다. 모르겠다. 그냥, 나는 그들과 어울릴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학기가 시작되어 교실에서 수업을 같이 들었지만, 반갑게 인사하는 아이들에게 그저 그런 헛소리만 지껄이고 돌아서곤 했다. 그런 날이면, 나는 어김없이 '나는 도대체 왜 이렇게 불행한 것일까'하는 생각에 빠져 혼자 술을 마셨고 엄마를 그리워했다. 대갈이 집에 돌아올 때쯤이면, 방안에 소주병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런 어느 날, 대갈이 술에 취해 잠들어 있는 나를 깨웠다.


"똥수야! 인나 봐라." 겨우 눈을 뜬 나를 보며, 대갈이 말했다.

"똥수 니, 엄마 함 찾아볼래?"

"뭐라카노, 고마 잘란다. 냅둬라."


대갈을 뒤로하고 모로 누운 나는, 다시 잠에 들지 못했다. 벌써 13년이 지났다. 엄마를 못 본지가. 엄마 얘기를 꺼내, 그날 해운대의 그 기분 나쁜 싸움을 떠올리게 한 대갈이 밉기도 했지만, 대갈의 말처럼 엄마를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에 가슴이 저며왔다. 그래, 엄마가 보고 싶었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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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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