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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신 Oct 25. 2020

그래도, 바람은 분다

누구나 플라타너스를 키운다

https://brunch.co.kr/@desunny/61

(앞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어느덧 가을이 깊어졌다.


2학기 중간고사 기간이 지나고, TV에서는 롯데와 빙그레의 한국시리즈가 벌어지고 있었다. 빙그레의 우승을 점치는 뉴스가 많이 나왔지만 롯데도 만만치 않았다. 롯데는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을 2승으로 가볍게 이겼다. 당구장의 죽돌이 형들은 김성근감독 욕을 해댔다. 10월 14일에는 롯데가 빙그레를 이겨버렸다. 정규 시즌 겨우 3위였던 롯데가 이긴 것이 죽돌이 형들은 부러웠던지, 다시 김성근감독 욕을 해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경질이 되었다.


나는 도대체 그게 뭐가 중요할까, 생각하며 당구공을 닦고 바닥을 쓸며 하품을 직직해대며 담배를 피웠다. 지겨웠다. 이제 그만 때려치우고 싶었다. 학교에서는 동기 녀석 중에 한 명이 군에 들어간다고 연일 술을 퍼마시고 다녔는데, 2학기 학과 대표가 그 녀석의 '공식' 입대 환송회를 열었다. 무슨 환송회를 그리 많이 하는지. 벌써 남자 동기들끼리 한 번 여자 동기들 포함해서 한 번 비공식 환송회를 했는 데도, 또 공식 환송회를 한다고 했다. 나는 그 녀석이랑 그리 친하지도 않았고, 해운대에서의 싸움 이후로 동기들과 어울리는게 좀꺼려졌지만 그래도 동기들 중에 처음 군에 가는 녀석이라 환송회에 참여를 했다.


군에 가는 동기 녀석은 술을 퍼마셨다. 한잔씩 돌려가며 소주잔을 돌리고, 다시 원샷을 하고 한 마디를 하고 또 원샷을 했다. 술이 취해서 낄낄거리고 있는 녀석의 옆에는 늘 똑똑한 척 구는 여자 친구, 윤정이가 붙어 있었다. 그녀는 군에 가는 남자 친구가 불쌍해서인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며, 나도 여자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처럼, 옆에 붙어서 챙겨주는.. 여자 친구.


그러면서도, 내 처지에 무슨 여자 친구냐 하는 마음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보육원에 있어서 군에 가지 않아도 되는 건 참 괜찮은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28개월 동안을 군복을 입어야 하다니. 낮부터 시작한 환송회가 끝나갈 저녁 무렵, 나는 당구장 아르바이트를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지만, 술이 취해 갈 수가 없었다. 전화라도 해야 했지만 귀찮았다. 그리고 다음날 당구장 주인 형에게 혼이 났고, 그 길로 그만둬버렸다. 무기력했다.


점점 더 무기력해지는 나와는 달리, 대갈은 점점 더 활기가 넘치는 듯했다. 나는 그런 대갈이 이상했다. 어느 토요일 저녁에 대갈과 나는 술을 마셨다.


"야, 니 요즘 뭐 좋은 일 있나?" 대갈에게 물었다.

"뭐, 와? 뭐 좋은 일 있는 거 같나?"

"어, 니 씨,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재? 나는 고마 얼굴이 썩어가는 데, 니는 진짜 좋아 보인다 아이가"

"뭐라카노.. 내가 니한테 뭘, 숨기는 게 있노. 그런 거 없다."

"아, 그렇나? 고마 술이나 묵을까. 아, 근데.. 요즘 미자 누나는 우예지내지? 궁금하네.. 나는 안 본 지 벌써 1년이 지났는데.."

"응, 잘 지낸다. 애가 이제 세 살 됐잖아. 누나가 집에서 재봉틀 박으면서 애 키우고 있다 아이가."

"아, 그~래? 갸, 알라, 이름이 뭐였지?"

"갸가, 민서였지"

"그래? 니는 우예 그래 잘 아노? 누나 몇 번 봤나? 니 혹시.. 매주 나가는 기..?"

"아아, 그냥, 가끔 봤다. 마, 고마 술이나 무거. 쓸데없는 말 말고."


나는 술을 마셨다. 학생이 되면서 술이 많이 늘어, 이제는 대갈과 대작 정도는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술을 마시면 마실 수록, 대갈의 머리가 작아 보였다. 한 해 사이 등치가 점점 커져서 인지, 아니면 술이 취해서 헛것이 보이는 건지 헷갈렸지만.. 큰 머리가 어떻게 작아지겠냐는 생각에 소주잔을 들고 술을 들이켰다. 갑자기 외로움이 밀려와서 다시 한 잔을 또 들이켰다. 그리고 또 한잔.


"니, 와 그러노? 요즘?" 대갈이 나에게 물었다.

"와? 뭐? 왜?"

"니 요즘 술도 너무 많이 묵고, 담배도 많이 피우는 거 같던데."

"와, 그러먼 안되나? 냅둬라.. 고마"

"이, 짜슥.. 걱정돼가 그라지? 엄마는 함 찾아봤나? 안 찾아볼끼가?"

"몰라.. 찾아봐야 할지, 어디서 어떻게 찾기 시작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원장 쌤 한테 함 가봐라." 

"..."

"와, 가기 싫나? 니, 다음 주에 내캉 한 번 가볼래?"


대갈과 나는 보육원 동생들에게 줄 선물을 마련해서, 11월의 첫 일요일에 경산에 있는 보육원에 갔다. 삼공단에서 경산까지 가는 길은 너무 멀어서, 버스를 세 번 갈아탔다. 바람에 날려 떨어진 노란 단풍잎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고, 청소부 아저씨들은 그 노란 낙엽을 쓸고 있었다. 나무는 앙상한 가지를 드리우며  다가오는 겨울을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제 막 낙엽이 떨어져 가지를 드러내기 시작한 플라타너스 거리를 지나 보육원에 도착했다. 보육원 마당에는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그간 함께 놀고 보살폈던 어린 동생들이 우리를 보고 달려왔다. 동생들은 잠깐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선물을 받아서 지들끼리 낄낄거리며 웃으며 이게 좋다, 저게 좋다 서로 실랑이를 하며 티격태격 대기 시작했다. 나는 도대체 내가 반가운 건지 선물이 반가운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대갈은 쭈뼛거리며 떨어져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낯선 아이들을 불러서 선물을 나눠주고 있었다.


건물 앞에서 뒷짐을 지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원장 아저씨가 반갑게 우리를 맞이했다. 2년. 2년 만에 처음 방문을 했다. 내 뒷덜미를 잡아 엄마를 따라가지 못하게 잡았던 원장 아저씨, 나를 키워주셨지만 그때의 일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나를 잡지만 않았어도, 엄마랑 같이 살 수도 있었을 텐데. 내 속도 모르고, 대갈은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우리는 사무실로 들어가 바닥에 엎드려 원장 아저씨에게 넙죽 절을 했다. 그간 잘 있었냐, 못 찾아와서 죄송하다는 이런 말들이 원장 아저씨와 대갈 사이에 오갔다. 나는 옆에서 네네 하며 앉아 있었다. 대갈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젠장.


"저, 아저씨. 근데요. 제가 엄마를 좀 찾아보고 싶어서예. 우짜면 찾을 수 있을까예?" 나는 원장 아저씨에게 엄마 얘기를 꺼냈다.  

"..."


원장 아저씨는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어색한 시선이 교환되고 침묵이 흘렀다. 원장 아저씨가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다. 창문 밖에는 우리가 늘 밥을 먹던 식당 건물이 있었다. 그 지붕 위에는 넝쿨을 틀며 이어진 호박 줄기를 따라 누렇고 커다란 늙은 호박이 주렁주렁 열려있었다. 가을만 되면 미자 누나의 잔소리를 들어가며 저 누렇고 커다란 호박에 찹쌀과 팥, 고구마를 섞어 호박범벅을 해 먹었다. 대갈과 나는 주로 호박을 따고 그걸 반으로 쪼개 그 속을 파내는 일을 맡았다. 그 누런 호박의 냄새가 싫어서 범벅을 안 먹겠다고 다짐을 지만 미자 누나가 끓인 호박범벅은 안 먹고는 배길 수 없을 정도로 따뜻하고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누나가 해주는 범벅을 다시 먹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던 중에 원장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니, 캐나다라고 아나? "

"예? 어데 예?"

"캐나다, 저 미국 위에 있는 나라 말이다. 니 엄마가 거게 갔다. 니 맡겨 놓고."

"예? 정말로요?"

"그래, 꼭 돌아올 거라고 했는데.. 니가 크는 동안에는 딴 생각할까 말을 못해줬다. 미안타.. 똥수야"


남자 동생들은 그저 저희들끼리 공을 차고 노느라 정신이 없었고, 여자 동생들은 나무 아래 쪼그리고 앉아서 공기놀이를 하고 있었다. 대갈과 나는 마당 한편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동생들을 바라다. 대갈은 공을 차는 남자 동생들에게 이래라저래라 간섭을 하고 있었고, 나는 왜 나만 즐겁지 않을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마당에서 놀고 있는 동생들의 웃음소리와 티격태격 싸우는 소리, 떨어지는 낙엽과 낙엽을 싣고 가는 바람의 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정지한 느낌..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빌어먹을.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끝도 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뜨거워진 내 얼굴을 바람이 슬쩍 어루만지며 지나갔다.


https://brunch.co.kr/@desunny/83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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