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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신 Nov 09. 2020

본색, 숨어있는 것들

누구나 플라타너스를 키운다

https://brunch.co.kr/@desunny/64

(앞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그해 겨울은 혹독할 만큼 웠다.


밤만 되면 텅텅 비는 3 공단의 거리는 가로등마저 띄엄띄엄 떨어져 있어 더 어둡고 삭막했다. 나는 그런 밤이 싫었다. 특히 대갈이 밤샘 근무를 하는 날이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잠 못드는 밤이면 귓 속에서 '위이잉 위이잉'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마치 비행기가 내는 굉음 같았다. 괴로웠지만 나는 그 소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술의 힘을 빌렸다. 귓전을 울리는 소리를 떼어내는 데에는 역시 술이 최고였다. 처음엔 한 병이었지만, 겨울이 끝나갈 무렵에는 두 병 정도는 마셔야 귓전에서 소리가 나지 않았고,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


겨우내 마셔댄 술병이 자취방 부엌 한 귀퉁이를 가득 매울 즈음에 목련이 피기 시작했다. 목련이 고개를 떨굴 즈음에 나는 휴학계를 냈다. 방에 박혀 술이나 마셔대서 학비도 없었지만, 주제도 안 되는 것이 괜히 대학에 들어갔다는 자괴감에 빠져 더이상 학교를 다니고 싶지 않았다. 엄마가 나를 버리고 떠났는 데, 나는 도대체 무슨 희망이 있어서 대학을 들어간 것일까. 집 밖에는 목련을 뒤따라 벚꽃이 피고 있었지만 나는 아직 겨울에 머물러 있었다.


"똥수야, 니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끼고?" 나뒹구는 술병을 껴안고 자고 있던 나를 대갈이 깨우며 말했다.

"..." 겨우 한쪽 눈을 반쯤 열고 쪼그만 창으로 비치는 아침 햇빛을 통째 가리고 있는 커다란 대갈의 얼굴을 쳐다봤다. 후광이 비치는 대갈의 얼굴은 어두웠다. 아니, 험악했다.

"똥~수야! 니 와그라노? 응, 뭐하는 기고.. 도대체 술을 얼마나 쳐 물라 카노?" 대갈이 윽박질렀다.

"와~ 씨바, 고마 냅둬라. "

"이 짜슥이 미칬나. 니 우짤라고 그라노. 이 등신아"

"고마 냅둬라. 나는 고마.. 고마.. 죽고 싶다."

"..."

"..."

"니, 새끼! 정신 못 차리나!"


다시 눈을 떴다. 아침인지 저녁인지. 눈이 뜨거웠다. 대갈이 옆에서 내 눈두덩이 위에 차가운 물수건을 올렸다. 왜 이리 눈이 뜨거울까, 생각하며 멍하게 있는 나를 향해 대갈이 안쓰러운 눈 빛을 보냈다.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거울에 얼굴을 비쳤다. 젠장! 검푸른 색이었다. 이런 망할 대갈. "씨바" 하고 욕을 날렸다. 그 검푸른 눈탱이는 우주에 연결되어 있는 블랙홀 같았다. 블랙홀. 그 것을 통해 내 마음속 먹구름이 빠려 나가는 듯 했다. 젠장.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무릎에 얼굴을 박고 흐느끼는 나의 머리를 부드러운 손길이 쓰다듬었다.


그해 5월, 나는 학교 앞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더 이상 술을 사 먹을 돈도 없었지만, 다음 학기에는 복학을 하고 싶었다. 빨리 졸업을 하고 돈을 벌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서울에 가서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 많이. 한, 4천 억 정도.... 지만, 4천 억을 벌기에는 내가 다시 시작한 아르바이트에서 받는 시급으로는 너무나 미약했다. 시간당 1200원. 하, 당장 다음 학기 등록금을 낼 수 없을 것 같아 낮에 하는 서점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아르바이트 때문에, 대갈과는 얼굴 볼 여유가 없었다. 밤 11시나 되어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고, 주야 근무를 하는 대갈과는 겨우 1주일에 얼굴 한 번 마주치는 정도가 다였다. 그것도 거의 스쳐 지나가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5월이 가고 6월이 왔다. 학교에서는 친구들이 기말고사를 치르고 있었다. 기말고사 덕분에 술집도 손님이 줄었고 가끔 찾아오던 동기 녀석들의 발걸음도 뜸했다.


6월 초, 어느날, 작년에 군에 간 동기 녀석의 여자 친구인 윤정이가 술집에 들어왔다. 여섯명, 남녀 세명씩 짝을 이루고 있었다. 윤정이와 나는 별로 친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나쁜 사이도 아니었다. "왔냐" 하고 간단한 인사를 건네고, 안주로 주문한 수박화채와 레몬소주 한 주전자를 가져다주었다. 그날따라 여기저기 불러대는 손님들을 응대하느라 바쁘게 오가는 사이에 윤정이가 술에 취했는지, 깔깔 거리며 하이톤으로 웃었다. 같이 온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서로 잘 보이려고 목소리를 높여서 농담을 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젓가락 뒤집기 놀이를 하며 걸리는 친구에게 서로 술을 먹이기 시작했다. 윤정이는 깔깔거리며 옆자리에 앉은 남자의 허벅지에 손을 대고 있었다.


손님이 많아 바쁘게 왔다갔다 하는 사이에 윤정이와 친구들은 나가고 없었다. 잘 가라는 인사도 못했다는 아쉬움과 함께 허벅지에 손을 대고 있던 윤정이와 군에 간다고 몇 번씩이나 환송회를 해주었던 동기녀석, 그리고 그 앞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앉아있던 또다른 윤정이가 떠올랐다. "가시나, 뭐꼬?" 한 숨 같은 소리가 입에서 새어 나왔다.


며칠 후 서점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술집으로 향하는 길에 윤정이와 우연히 마주쳤다.


"니, 그날 잘 들어갔나?"

"응, 잘 갔지. 니는 알바 몇 시까지 하는데? 늦게 까지 하나? 힘들겠다."

"응, 아이다. 10시까지 밖에 안 한다. 개 안타. 근데, 니 그날 그 친구들 뭐꼬. 웬 남자들이고? 니, 혹시..."

"..."

"..."

"똥수야, 있잖아. 나는 세상에 남자가 하나뿐인 줄 알았다 아이가. 근데, 돌아보니까 만~트라..."

"..."

"와, 니도 알제? 기차 한 번가고 나면, 또 다른 기차 오는 거? 암거나 타면 우떻노. 다 그런거 아이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던 윤정이는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인지. 그래, 세상엔 남자가 많긴 하다. 젠장.


6월 말, 시험을 마친 거리는 온통 술판이었고 술 취한 남자들은 1, 2차도 모자라 포장마차에서 까지 술을 마시며 거리에 온갖 더러운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북문 앞의 포장마차에는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이 많아서, 길 옆에 반짝이 은박 자리 깔고 술을 팔기 시작했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시원한 밤바람을 맞으며 술을 마시는 그들을 보면 '나도 저기서 대갈과 한 잔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대갈이 토요일 저녁 일을 마치고 내가 일하는 술집으로 왔다. 젠장. 얼굴을 제대로 못 본 지 겨우 두 달 지났지만, 마치 몇 년이 흐른 것 같은 느낌에 눈물이 날 정도였다. 대갈은 혼자 소주를 두 병 정도 먹었다. 나는 술만 먹는 대갈이 걱정이 되어, 주인 몰래 서비스 안주를 슬쩍 내주었다. 홀의 여기저기를 왔다 갔다 하며, 슬쩍슬쩍 바라본 대갈은 머리가 작아진 건지 등치가 더 커진 건지 헷갈렸다. 175인 나보다 십 센티나 더 크고, 머리 크기만큼이나 손, 발도 커서 옛날 같았으면 칼 차고 다니며 사람들 머리를 날리며 명성을 날렸을 것이다. 대갈은 아무리 봐도 때를 잘 못 만났다. 진짜, 불쌍한 자식이다.


10시, 대갈과 나는 겨우 술집에서 나왔다. 대갈은 등치만큼이나 술이 강해서 술을 세 병이나 먹었는 데도 멀쩡했다. 우리는 북문 앞의 포장마차에서 깔아놓은 은박 자리에 앉아 술을 먹기 시작했다. 한낮의 뜨거운 태양이 사라진 자리는 밝은 보름 달이 대신하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얼마 만에 마시는 술인지. 우리는 맥을 먹었다. 별 안주도 없이 마신 술에 취기가 올라왔다. 먹고 마시며 떠드는 사람들 사이로 술병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어디선가 욕을 하는 남자들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포장마차를 마주한 소방도로 언덕에서 한 무리의 등치 큰 남자들이 술에 취해 내려오며 자기들 끼리 욕을 하고 어떤 놈은 길을 걷는 다른 이들을 노려보기도 했다. 하나 같이 거구인 그들 사이에는 높은 하이힐과 빨간 입술이 돋보이는 여자들도 있었다. 대갈과 나는 하릴없이 그들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술을 마시려는 순간, 내 턱에 어떤 것이 강하게 섬광처럼 와 닿았다. 육중했다. 퍽! 소리와 함께, 나는 측으로 나뒹굴며 쓰러졌다. 주변에서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입에서 무언가 흘러내렸고, 눈은 촛점을 잡지 못해 사물들이 속도감 있게 스쳐 지나가는 듯 했다. 누군가 내 머리를 잡고 무릎에 올려 입주위를 닦았고, 다른 누군가는 사람들 옆에 놓여있던 술병을 옆으로 치우고 있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대갈을 찾았다. 맞은편에 있던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머리를 들어 주위를 둘러봤다. 대갈이 서있었다. 그 앞에는 두 명의 등치가 쓰러져 있었고, 여섯 명의 등치들이 대갈을 둘러싸고 있었다. 모두 대갈 만 하거나 대갈 보다 커 보이는 녀석들이었다. 등치들과 함께 있던 여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오빠 어쩌고 저쩌고 하며 소리를 치고 있었다. 대갈의 맞은편 등치가 오른쪽 주먹을 날렸다. 씨름 선수처럼 생긴 녀석이었다. 대갈은 뒤로 몸을 슬쩍 빼며 주먹을 피했다. 등치의 오른쪽 등이 대갈의 앞으로 쑥 빠져들어갔다. 대갈은 오른쪽 팔로 등치의 목을 뒤에서 감싸 안고 오른쪽 다리를 안쪽으로 깊게 집어넣어 허리를 숙여 몸을 들어 올려 던져버렸다. 등치가 코를 앞으로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퍽! 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사이에 한 녀석이 뒤에서 대갈을 팔로 감싸 안았다. 대갈 앞에 있던 녀석이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대갈의 얼굴에 녀석의 주먹이 들어갔다. 쩍! 대갈과 대갈을 안고 있는 녀석은 비틀 거리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대갈의 머리가 앞으로 푹 수그러 졌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힘차게 뒤로 뻗쳐 올라왔다. 대갈을 뒤에서 잡고 있던 녀석은 팔을 풀고 코를 잡았다. 대갈은 왼쪽 발을 뒤로 힘차게 쭉 뻗어 녀석의 명치에 뒷꿈치를 날렸다. 배를 맞은 녀석은 힘없이 푹 주저 앉았다. 앞에 있던 녀석이 다시 대갈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대갈은 머리를 앞으로 숙였다. 녀석의 주먹이 대갈의 머리통에 박혔다. 주먹을 손에 쥐고 뒤로 주춤하는 녀석의 얼굴을 대갈이 머리로 박아버렸다. 수박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낭중지추(囊中之錐). 주머니 속의 송곳. 대갈의 옆에 다섯 명이 쓰러져 있었다.


거리에는 어머, 어머 하며 소리 지르는 여자들과 주춤대며 서서 한마디씩 거들며 구경을 하는 술 취한 남자들이 모여들었다. 어느새 대갈과 등치들을 둘러싼 원이 만들어졌다. 그 중앙에 대갈이 있었다. 내 친구 대갈이. 싸움은 소강 상태였다. 쓰러진 5명의 등치들을 보고, 나머지 놈들은 쉽게 대갈을 공격하지 못했다. 그들은 온갖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퍼대며 분위기를 점점더 험악하게 만들었지만 서로 눈치를 보며 먼저 움직이려 하지는 않았다. 대갈은 서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거기 뭐하는 거야! 이 짜식들이!"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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