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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신 Nov 17. 2020

소설 읽는 여자

누구나 플라타너스를 키운다

https://brunch.co.kr/@desunny/83

(앞의 글에서 이어집니다.)


빵빵하게 생긴 아저씨가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서있었다. 부라린 에서 레이저가 나왔다. 그 뒤로는 검은색 복장에 하이바를 쓴  한 무리의 남자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경찰봉을 들고 있었다.


"야! 이 새끼들 다 잡아!"


경찰들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사방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현장을 둘러싼 구경꾼들은 웅성거리며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둘레는 넓어졌다. 당황한 치들과 대갈은 뒤로 주춤거리며 밀려났다. 쓰러지지 않은 치 세 명은 도망을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경찰봉에 두들겨 맞바닥에 주저앉았다. 경찰들은 양옆에서 대갈의 팔을 잡고 무릎을 꿇렸다.


순식간에 상황이 정리되었다. 학교 앞이라 워낙 모가 많았다. 근처 파출소에는 전투경찰이 늘 주둔하고 있었다. 그 경찰들이 신고를 받고 출동했던 것이다. 나는 여전히 누군가에게 기대 있었다. 치의 발에 턱을 맞고 쓰러졌을 때, 내 피를 닦아 준 사람이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머릿속에는 경찰들에게 잡힌 대갈에 대한 걱정 뿐이었다.


"괜찮아예?"


여자 목소리였다. 나는 머리를 돌려 여자를 바라봤다.  그녀의 손에 피 묻은 손수건이 들려있었다. 내가 쓰러졌을 때 무릎에 나를 기대어 피를 닦아준 여자다.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도 그녀의 목소리는 이상할정도로 차분했다. 긴 머리카락이 가슴까지 흘러내려 있었다. 반달 모양의 눈, 계란형의 얼굴, 약간은 동그스럼한 코, 그리고 도톰한 입술에 내 시선이 머물렀다.


"저기요, 괜찮아예?"


다시 들려온 그녀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나는 말없이 꾸벅 인사를 했다. 그녀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끌려가는 대갈의 뒤를 따라가기 위해 일어섰다.


어느덧 아침이 왔다. 경찰서 구석에서 깜빡 잠이 들어 버렸다. 대갈은 유치장 한 구석에 쪼그리고 자고 있었다. 밤새 고성과 욕설이 오갔다. 조서를 쓰고 치들과 대갈은 유치장에 들어갔다. 나는 그런 대갈이 안쓰러워 힘이 되려 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몇 마디 주억거리는 것뿐이었고 학생은 저기 가서 앉아 있으라는 핀잔만 돌아왔다.


마치 꿈만 같았던 지난밤의 일을 떠올렸다. 파노라마처럼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어쩌다가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봤다. 그때, 미자 누나가 뛰어들어왔다. 누나는 나를 보자마자 유치장에 쪼그리고 누워있는 대갈을 찾았다. 대갈을 바라보는 누나의 눈동자에 작은 이슬이 맺히더니 또르르 굴러 내렸다.


누나의 눈물. 누나는 대갈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보송보송하던 누나의 볼은 어느새 갸름해져 있었고 긴 생머리는 단발머리로 변해 있었다. 눈물은 갸름한 볼을 타고 매끄러운 턱선을 따라 흘러내렸다. 한 방울이 똑! 하고 누나의 볼록 나온 배에 떨어졌다. 다시 한 방울, 다시 한 방울. 그렇게 몇 방울이 떨어지고 난 후에야 대갈은 눈을 떴다. 누나와 시선을 마주한 대갈의 흐리멍덩한 눈빛에 천천히 꽃송이가 피었다.


"고마, 울지 마라!"


젠장! 나는 등을 돌렸다. 눈물이 흘렀다. 미안했다. 그리고, 불안했다.


그 싸움 덕분에 대갈과 나는 그간 모아두었던 돈을 모두 합의금으로 내뱉어야 했다. 치도 큰 것들이 약해 빠져서 깨지고 터진 곳이 어찌나 많았던지, 대갈이 2년 동안 모은 돈과 내가 아르바이트로 일한 돈까지 모두 합해서 겨우 합의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갈과 나는 헤어졌다. 아니, 헤어졌다기보다는.. 대갈은 누나와 함께 지내기로 했다. 망할 놈의 자식이 언제 그렇게.. 누나는 아이를 가졌다.


그날, 싸움이 있던 날, 대갈은 내게 사실을 털어놓으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날 싸움이 나는 바람에 말을 할 수 없었다고. 미안하다고, 이제는 누나를 보살펴야 한다고. 나는 대갈과 누나의 행복을 빌어줬다. 젠장! 학교 앞으로 이사를 오면서 나는 눈물을 흘렸다. 내 친구 대갈의 행복을 빌었지만 혼자서 잘할 수 있을지... 두려웠다. 정말 두려웠지만 그래도 살아야 했다. 얼마간의 돈으로 방을 구했다. 남은 생활비가 없서점과 술집 아르바이트는 빠지지 않고 열심히 했다.


7월 한여름의 무더위가 한창이었던 어느 한산한 아침이었다. 나는 손님을 맞을 준비를 마치고 카운터에 멍하게 앉아 있었다.


"어, 안녕하세요?" 긴 머리의 여자가 몇 권의 책을 카운터에 올려 놓으며 인사를 했다.

"네? 아, 네. 안녕하세요." 나는 여자가 건넨 책들을 받아 들고 계산하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저 기억 안 나요? 그때 그분 맞는 거 같은데. 혹시.. 요 앞 포장마차에서.. 그 턱을 차여서.."


나는 고개를 들어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 갸름한 턱선에 반달 모양의 눈, 도톰한 입술 끝이 한껏 올라가 있었다. 갈색의 긴 머리카락이 빛에 반짝였다. 그녀의 웃음에 어색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감사 인사를 하며 그녀가 내민 책을 주섬주섬 정리해서 봉지에 담았다. 물건을 파는 듯한 갈색머리 여자 사진이 있는 토익책과 공지영의 소설인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가 있었다.


그날부터 나는 그 여자를 떠올렸다. 공지영의 소설을 읽는 여자, 무릎에 내 머리를 올리고 피를 닦아주던 그녀. 그리고 그렇게 그녀를 떠올리는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나는 그녀를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언제 다시 서점에 올 것인지, 몇 학번인지, 몇 살인지, 어느 과의 학생인지, 남자 친구가 있는지, 없다면.. 어떤 남자를 좋아하는지, 그리고... 나는 어떤지. 그렇게 그리움이 깊어질수록 이른 새벽에 잠을 깼다. 잠이 깨자마자 그녀를 떠올렸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그녀에게 어울릴까?'


그녀를 보고 싶었다. 겨우 두 번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 매일 아침, 그녀가 오지 않을까 기다렸다. 그녀가 오면 "그날 고마웠어예. 제가 밥이라도 한 번 사고 싶은데예."라고 말해야 겠다고 다짐했다. 거울을 보며 연습을 했다. 젠장. 표준어가 나와야 하는 데. 맨날 "~예"로 끝나는 이놈의 사투리는.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그녀가 서점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하며 나는 반사적으로 인사를 했다. 그녀가 반달 같은 눈과 도톰한 입술을 한껏 올리며 하얗게 웃었다. 그녀와 나의 눈빛이 교차했다. 가슴이 뛰는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내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소설책이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천천히 책을 펼쳐보는 그녀의 하얗고 긴 손가락과 어깨를 타고 흐르는 머리카락, 매끄러운 목선을 타고 내려온 동그스레한 어깨를 슬쩍슬쩍 바라봤다. 하얀 면티셔츠에 연한 청색의 청바지를 입은 그녀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신은 검은 단화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말할 수 있을까, 말할 수 있을까.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아냐, 안돼, 안돼.' 머릿속의 생각들이 미친 듯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그녀가 카운터로 다가오고 있었다. 몇 권의 책을 들고.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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