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스톨 대학에서 받았던 영문학 수업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전 글에서도 말했지만 영국에서의 영문학 과정은 학교마다 차이가 있다. 어떤 학교는 선택과목이 많고 어떤 학교는 필수과목+선택과목으로 나누기도 한다. 브리스톨 대학은 후자였다.
브리스톨 대학을 선택했던 이유는 공부하고자 했던 모듈들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선택장애가 있던 나는 영문학의 전반적인 내용을 배우고 싶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필수과목들이 있는 대학이 좋겠다 싶었다. 브리스톨 대학에서는 영문학을 시대별로 나눠서 1150년대의 중세부터 현대문학까지 차례대로 배우게 했다. 또한 선택과목들 중에는 내가 하고 싶었던 중세 문학과 아동문학 옵션이 있었다. 특히 브리스톨 대학이 중세문학에 강점이 있는 대학이었다는 것도 내가 선택한 이유 중 하나다.
1학년때는 한국에 돌아가고 싶었다. 영문학 수업이 너무 힘들기 때문이었다. 파운데이션을 막 마친 나는 이제 간신히 국제학생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영어 수준이었다. 그리고 현지 학생들과 대화하는 건 또 다른 난이도였다. 영국은 전에 말했듯이 토론 중심의 수업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의사소통은 필수였다. 친구들 말이 너무 빨라서 사실 2학년때까지도 알아듣는 게 힘들었다.
영문학은 더군다나 대부분 토론으로 수업이 진행된다. 우리는 1학기에 3가지 모듈을 들었다. 이게 적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수업들을 매주 준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수업들이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건 매주 '책 한 권 읽어오시오,' 였다. 어떤 말로는 한 주에 책을 3권 읽어야 됐을 때도 있었단 소리다. 물론 책의 내용이 많으면 2주에 걸쳐서 하기도 하고, 단편이나 시 같은 경우는 분량이 많지 않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읽어가야 할 논문들까지 포함하면 영문학 공부는 정말 인생을 읽기에 갈아넣어야 한다. 각 모듈마다 최소 6권은 읽어야 했기 때문에 3년 공부하면서 책을 80권 이상 읽었다고 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 브리스톨 대학은 1학년때부터 1150년대, 중세 영문학 초기부터 공부하게 된다. 여기서부터가 필수 과목이었고 우리가 말하는 고대 영어, Old English는 선택과목으로 배울 수 있게 했다. 사실 고대영어도 어렵지만 중세영어도 읽기 쉽지 않다. 특히 Sir Gawain and Green Knight, 가웨인경과 녹색기사는 스코틀랜드 영어까지 섞여있어 난이도가 최상이었다. 한 장 읽는데 20분~30분 걸렸다. 모르는 단어를 다 찾아가면서 읽어야 했기 때문이다.
가웨인경과 녹색기사 첫 두줄을 가져와봤다:
Since Troy's assault and siege, I trow, were over-past,
To brands and ashes burnt that stately burg at last,
트로이 공격과 포위 이래로,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미 지난 과거의,
불과 재로 불탔던, 그 화려한 도시들이 마침내,
최대한 직역해서 번역해 보았다. 일단 문장구조가 매우 다르다. 이건 소설이라기 보다 시이기 때문에 그렇다. 끝에 'past'와 'last'로 운율, rhyme 을 맞춘 걸 알 수 있다. 또한 'trow'라는 단어는 옛날에 think, believe로 사용되고 brand 는 고대영어부터 1425년까지 불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burg' 또한 현대 영어에서의 city로 해석될 수 있겠다. 전체적으로 보면 트로이 전쟁 이후의 일을 말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처럼 영어 단어들이나 문법들은 시대에 따라 변화했기 때문에 현대영어에만 익숙했던 나는 중세영어를 읽는 게 고역이었다. 사실 현대영어조차 미국식 영어 영국식 영어가 달랐고 나는 이제 영국식 영어에 적응해가는 단계였는데 중세 영어까지 끼어드니 삼재가 겹친 느낌이었다. 1학년 초반은 정말 '한국에 가야되나' 하는 생각으로 수업에 임했던 것 같다.
1학기가 어찌 끝나고 방학이 왔다. 사실 1학년 1학기는 학교에서도 학생들에게 대학 시스템에 적응할 시간을 주기 때문에 과제가 많지는 않다. 특히 영문학은 시험이 많이 없고 에세이 위주라서 글을 많이 썼다. 또 다행인 점은 1학년 때의 점수는 졸업점수에 반영이 되지 않는다. 뭔가 적응할 기회를 주는 합리적인 제도라고 생각했다.
방학이 되고 다음 학기에 공부할 책들을 미리 읽어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의 방학은 학교에서의 생존을 위한 시간이 되었다. 그렇게 책을 미리 읽어가자 공부하기가 훨씬 편했다. 이 방학을 이용해 다음 학기 준비를 하는 과정은 3년 졸업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학기 중에는 도저히 책을 다 못 읽었기 때문에 나름의 노하우를 발견한 것이다.
오히려 2학년, 3학년이 될수록 점점 공부는 편해졌다. 2학년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에 가야되나'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지만 3학년은 정말 놀면서 다녔다 라고 할 정도로 여유가 많이 있었다. 그동안 독해가 많이 는 탓과 갈수록 공부가 현대영어에 가까워진 탓이라고 생각한다.
영국에서의 수업의 장점은 최대한 학생 개개인의 생각을 존중하려는 점이다. 정말 주제에 벗어난 거 같은 학생의 의견도 교수님은 종종 'Interesting' 하시며 넘어가시곤 했다. 책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다양성을 포용하는 게 나도 맞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나도 남들이 보기에는 이상한 해석들을 내놓았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 다양성들 속에서 가끔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흥미로운 생각들을 발견하곤 했다. 2학년 때 들었던 Fairy Tale, 설화 과목에서 한 친구가 헨젤과 그레텔에서 헨젤이 빵을 떼어 떨어뜨리는 게 성찬식을 생각나게 한다고 했다. 헨젤과 그레텔 저자인 그림형제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고 헨젤과 그레텔 안에서 성경적인 요소들로 볼 수 있는 흰 비둘기, 흰 조약돌, 흰 오리 등이 있는 것을 보면 가능성 있는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답을 정해놓고 생각하는 사고방식 보다 여러 답들 속에서 가능성을 찾는 수업들이 내가 배운 정말 큰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조별과제가 우리도 있었다. 대부분이 발표관련이었다. 거의 매 학기마다 있었던 거 같다. 나와 발표했던 팀원들은 모두가 괜찮았다. 내가 그들에게 괜찮은 팀원이었는지 다른 문제긴 하지만. 과제는 팀원끼리 모여서 각자 할 부분들을 정하고 모여서 합을 맞추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10분 발표에 5명이 한 조라면 한 명당 2분씩 공평하게 맡아서 진행했다. 사실 다른 학과에서는 조별과제 잘 안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들었는데 우리 학과가 특별해서 그런걸까 생각이 들긴 했다.
영국에서 영문학은 사실 국제학생들이 지원하는 경우가 많이 없다. 영어 하나만 쓸 줄 아는 사람들, 그 중에서도 특히 백인이 우리 과에 많았다. 학과에 200명 정도가 있다면 내가 본 아시아인은 나 빼고 한 두 명 정도 였던 거 같다. 브리스톨 대학교가 특히 영국 잘나가는 집안 사람들이 옥스퍼드 캠브리지가 안되었을 때 많이 온다는 얘기를 들었었는데 영향이 있었지 않나 싶다. 그런면에서 나는 나이 많은 한국인으로서 적응이 더 쉽지 않았던 거 같다.
그럼에도 3년 동안 영문학을 공부하면서 나는 행복했다. 내가 좋아했던 책들을 수업했을 때 특히 좋았다. 물론 읽기 힘들었던 책도 많이 있었다. 사실 내가 좋아했던 부분은 한 30%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 같다. 특히 내가 사랑했던 아동문학은 영문학에서는 비주류에 가깝기 때문에 많이 공부할 수는 없었다. 또 영문학을 하면서 충격적인 사실들을 많이 알게 되긴 했다. Fairy Tale은 사실 어른 용이었다던지, 걸리버 여행기는 당시 작가가 영국 정부를 풍자하기 위해 쓴 글이었다는 것 등 말이다. 하지만 그밖에 책 말고도 영문학에 관련된 디즈니 만화라던지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한 게임들에 대해서 토론할 때는 정말 수업 준비하고 나가는게 재밌었다. 알라딘에서 마지막에 자파가 힘을 얻고 지니로 변신해서 원자 핵 같은 것을 표현하는 장면이 있다. 당시 미국이 이라크 전쟁중이었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알라딘 만화가 중동의 무슬림들에 대한 어떤 메세지를 포함하고 있었다 하면 당신은 믿겠는가?
3학년 마지막 논문을 끝으로 내 영문학 수업은 끝이 났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겠지만 교수님의 피드백을 받아가면서 글을 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부분들을 처음부터 다시 조사해야 했을 때는 정말 머리털 많이 뽑혔다. 그래도 내 지도교수님을 잘 만났던 탓에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우리는 자기가 하고 싶은 분야의 전문이신 교수님들 중에서 지원하는 식이었는데 다행히 내 거를 봐주신다 하셔서 행운이었다.
여기서 영문학을 하며 많은 것들을 느꼈다. 책이나 영화 등 문학작품들을 볼 때 어떤 부분에 의미가 있는지 좀 더 깊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대학 수업이 그렇지만 어떤 분야에 대해서 내가 집중에서 발전시킬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내가 배웠던 내용들 자체보다 거기서 경험했던 것들, 공부하고 생각하는 '방법'들을 배울 수 있어서 귀한 시간이었다. 또 세상에 불가능은 없다라는 것을 깨닫기도 했다. 수업들 가기 전 기도하며 오늘 하루 부끄러운 일 없이 무사히 마칠 수 있기를 바랬던 시간들. 안되는 영어로 더듬어가며 발표를 마치고 점수가 어찌됐든 안도했던 나날들. 2시간 내내 수업을 이해 못해서 가만히 앉아만 있다가 왔던 정말 스스로 바보같았다고 여겨졌던 때. 정말 열심히 읽고 준비했는데 막상 어떻게 말해야 될지 몰라 수업시간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있다가 수업 끝나고 말이라도 해볼걸 하며 후회했던 순간들. 이 모든 것들 가운데서 빛이 났던 것은 '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었던 거 같다. 물론 아직도 나는 내가 잘해서 졸업할 수 있었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열심히 했고 그걸 영국사람들은 봐주었다. 감사한 마음이다.
어떠한 이유로든 유학을 하는 분들이나 영국에 사시는 분들은 정말 자기가 이 길로 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언어와 문화를 뛰어넘어 우리가 지키고자하는 노력, 사랑 등의 소중한 가치들이 있을 때 승리하는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두 힘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