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가능성을 위한 관점의 전환, 인류세
도심 속 하루의 일상이 만드는 흔적들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사실 도시는 우리 행동의 흔적을 생각하지 않도록 만들고, 그 흔적들이 잘 보이지 않도록 디자인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새로운 것을 사고, 사용하고, 버리는 것에 익숙하지만 그것이 어디에서 왔고, 버려진 후 어떻게 되는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도시 공간 안에 뚜렷이 드러나 있지도 않지요. 어쩌면 보여지지 않기를 원하는 것일지도요.
2014년 사진작가 Gregg Segal은 일주일간 한 가정이 버리는 쓰레기를 하나의 프레임 안에 촬영하는 <7 Days of Garbage>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그의 초상 사진 안에는 인물들과 그들의 일주일이 만든 쓰레기가 함께 뒤엉켜 있습니다. 그의 사진들이 말해주는 메세지 또한 무겁습니다만, 사실 인간이 만드는 흔적들은 사진에 보여지는 쓰레기 이상의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온 역사들은 차곡차곡 지구에 쌓이고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것은 이전과는 너무 달라 학자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인간이 만드는 흔적들은 어떤 영향을 주고 있을까요?
새로운 시대의 등장, 인류세(Anthropocene)
인류세 (Anthropocene)는 과학자 폴 크루첸과 유진 스토어머가 제안한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입니다. 보통 시대를 나누는 기준은 지질학적 큰 변화, 화석에 따라 분류되는데, 현재 공식적으로 인류가 살고 있는 시대는 11,700년 전부터 시작된 홀로세 (Holocene) 입니다. 홀로세는 기후가 온화하고 안정되면서 인류 문명이 발전할 수 있었던 시대로 설명되고 있지요. 그런데 2000년, 크루첸 (Crutzen)과 스토어머(Stoermer)는 인류가 강력한 지질학적 힘을 행사하게 되면서 홀로세과는 다른 변화가 있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를 지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인구의 급격한 증가와 도시화가 그 변화이고 그로 인한 영향력은 안타깝게도 기후위기의 가속화, 대량 멸종, 오존 파괴, 인간이 만든 쓰레기들의 퇴적물 등이었습니다. 이에 크루첸과 스토어머는 산업혁명 시작으로부터 현재까지를 인류세라고 명명하는 것을 제안했습니다.
인류세는 지질학자들 사이에서도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과연 인간이 지층의 변화를 만들 정도로 큰영향을 끼쳤는지, 그렇다면 어느 시점부터인지, 산업혁명 이후의 인류 문명이 지질학적 시대를 가르는 기준이 될 수 있는지 등에 대한 치열한 논의가 오랜 시간 이어졌습니다. 또한 인류세 연구를 위한 실무 그룹이 형성되고, 지표를 찾는 연구들이 진행되고, 인간의 영향에 대한 토론들이 확장되었습니다.
착각이 만들어낸 재앙의 시대
인류세는 단지 지질학, 과학 분야 뿐 아니라 예술과 문학, 인류학과 신학 등 여러 분야의 학자들에게 언급되고, 연이은 토론의 화두가 되었습니다. 인류세가 비단 지질학적 분류의 문제가 아니며, 모든 분야에서 인간의 활동이 지구를 얼마나 심각하게 변화시켰는지에 대해 경각심을 일깨웠습니다. 그리고 더 깊은 차원에서 인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도록 했습니다.
그 맥락에서 인류세가 일으킨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인간중심적 관점의 변화입니다. 이전 서구사회는 자연을 이용하여 최대한의 이익을 내려는 관점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인간 vs 자연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바탕으로 인간이 자연을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지요. 그리고 그것은 산업혁명 이후 동서양을 막론하고 주된 철학적 관점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 보다 우월하고 명확히 구분된 종으로 인식되었고, 인간의 공간은 자연을 개발하며 구분되었습니다. 지구의 자원을 활용하여 더 많은 이익을 내고자 하는 정복적 사고는 인간과 인간 사이, 국가와 국가 사이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인간이 우월하기에 정복할 수 있다는 착각은 우리를 인류세의 시대로 이끌었습니다.
인류세에 대한 논의를 거듭하면서 과거의 관점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이어진 토론들을 통해 정복자로서의 인간이 아닌 자연에 영향을 미치는 하나의 행위자로서의 인간을 조명하게 되었습니다.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서도 정복하고 대치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로 관점이 전환되었습니다.
또한 관계에 대한 인식은 강대국과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관계, 식민지 역사와 그 영향에 대한 연구로도 발전되었습니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고 UN의 지속가능발전목표를 다시 살펴본다면, 왜 개발도상국과 선진국과의 불평등 문제, 사회 내 계층 불균형의 문제들을 주요한 목표로 다루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지속가능성은 인간 중심적 관점, 나아가 소수의 지배계급이 자신의 특권을 사용하여 정복적으로 해온 모든 활동에 대한 반성과 성찰, 그리고 그 관계를 새롭게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인류세가 던지는 질문들
모든 디자인에는 관점과 가치가 반영됩니다. 현재 우리가 살고있는 도시 디자인에도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근대화가 이루어지기 전의 한국은 자연과의 조화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를 형성해 왔지만 서구의 기술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서양의 인간 중심적 관점도 그대로 도시에 반영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는 시민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무언가를 사고, 쉽게 쓰고, 버리도록 합니다. 인간의 편리함이 무엇보다 우선됩니다. 인간과 자연은 구분되어 있고 시민들은 자연을 힐링의 장소나 배경으로 소비합니다. 자연을 좋아해서 숲세권에 살고, 오션뷰를 찾는 사람들이 반드시 생태계 질서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류세는 이러한 우리 사회의 모습에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그리고 우리 사회는 자연을, 지구에 함께 살아가는 비인간(non-human) 존재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나요? 밀고 개발하여 멋지게 무언가를 '짓는 것' 에 집중하고 있지는 않나요? 불편한 존재들은 도시 풍경에 보이지 않도록 밀어버리지는 않나요? 사람 간의 관계에서도 권력 구조가 단순하고 수직적이지는 않나요?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는 어떻게 바뀔 수 있을까요?
참조.
Trischler, H. (2016). The Anthropocene: A challenge for the history of science, technology, and the environment. NTM Zeitschrift für Geschichte der Wissenschaften, Technik und Medizin, 24(3), 309-335.
Crutzen, P. J., and Eugene. F. Stoermer. 2000.‘. The Anthropocene’. IGBP Global Change Newsletter, 41, 1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