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하는 디자인
미래를 상상하기 2.
'상상의 위기'에서 상상하기
지난 포스팅에서 상상의 위기를 맞은 오늘날의 사회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기술의 변화가 만드는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의 영역은 꽤나 발전했지만, 빠른 기술의 변화가 만드는 불안 또한 깊어지고 사회는 더욱 흔들리는 듯 합니다. 불안이 만드는 무력함을 뚫고, 우리는 어떻게 단단한 사회의 기반을 세워갈 수 있을까요? 지금은 어느 때 보다 사회적 상상력이 필요하지만, 잃어버린 상상력을 어떻게 끄집어 내야 할지 한편 막막해지기도 합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숨겨진 상상력을 깨우고, 오늘과 내일의 사이 그 어딘가로 우리를 안내하는 디자인 분야가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미래를 상상하는 것과 관련된 몇가지 디자인 이론들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스페큘러티브 디자인 Speculative design
스페큘러티브 디자인*(사변디자인/탐색 디자인)은 영어 단어도 한국어도 조금 낯설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분야는 1990년대에 앤서니 던과 피오나 라비를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던과 라비는 디자인을 통해 앞으로의 세상이 어떻게 변화할지 질문을 던지고, 생각하게 하는 디자인으로서 스페큘러티브 디자인을 제안했습니다. 사변한다는 것은 경험에 의지하지 않고 사고로 현실 또는 사물을 인식하는 것으로 다른 세계나 대안을 상상하는 능력을 바탕으로 합니다.
던과 라비가 일종의 선언문으로서 작성한 <A/B> 목록은 스페큘러티브 디자인이 추구하는 방향성을 또렷하게 보여줍니다. 던과 라비는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문제를 드러내고, 답을 내기 보다는 질문을 이끌어 내며, 산업보다는 사회를 위한, 소비자보다는 시민을 위한, 혁신보다는 도발하는, 구매를 장려하기보다 멈추어 생각하게 하는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던과 라비의 디자인 A/ 디자인 B 리스트 (2009) 디자인 A는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디자인을, 디자인 B는 던과 라비가 작업하는 디자인을 나타낸다.여기서 디자인은 상상을 통해 여러 난제들(wicked problems)에 새로운 관점을 불어넣고 대안적 삶의 방식에 대해 상상할 수 있도록 장려하고 영감을 줄 수 있도록 합니다. 디자인의 다양한 도구들, 방법론을 사용하여 난제들에 접근하며, 사람들과 미래에 대해 논의하고, 토론하고 함께 정의함으로써 대안적 시나리오를 탐색하고, 사람들이 바라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준비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믿습니다.
United Micro Kingdoms: a design fiction 은 대표적 사례로 소개할 수 있습니다. 던과 라비는 미래의 영국을 상상하면서 서로 다른 4개의 사회를 상상하고, 이를 시나리오, 오브제, 지도, 교통 시스템 등으로 시각화 했습니다. 각 사회는 고유의 정치 경제 시스템과 생활방식을 가지도록 하였고 이것이 하나의 실험실이 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각 마이크로 국가별 공간을 구성하고, 각 사회의 인터페이스와 문서 등을 디자인하여 2013년 런던 디자인 뮤지엄에 전시했고, 관객들이 서로 다른 사회를 경험하면서 스스로 상상하고 토론을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백캐스팅 Backcasting
백캐스팅은 지속가능성과 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방법론으로 디자인을 비롯한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백캐스팅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forecasting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Forecasting이 현재의 기술, 트렌드, 데이터 등을 기반으로 미래를 바라보는 예측기반의 방법론이라면, backcasting은 우리가 목표로 하는 미래의 모습을 두고 그 미래에 도달하기 위해 현재로 역추적해 오는 방법론입니다. 대표적으로 지속가능성을 이야기해 본다면, 지속가능한 미래는 우리가 예측하기보다는 도달해야 할 목표이기에, 목표하는 미래를 가정해 두고 도달하기 위한 구체적 단계와 정책, 시나리오 등을 디자인해 현재 사회에 적용해 보는 것입니다.
스웨덴의 예테보리**(Gothenburg)는 지속가능성 분야의 가장 선도적인 도시로 2000년대 초반부터 지속가능한 도시를 위한 Gothenburg 2050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backcasting 을 활용하여 2050년의 미래 모습을 설정하고 이를 위해 에너지 시스템, 교통, 폐기물 관리 등 다양한 분야의 전략을 도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시민, 정책 입안자, 학계, 산업계 등의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을 포함하는 참여적 프로세스로 진행되었습니다.
전환디자인 Transition Design
전환 디자인은 Terry Irwin 이 동료들과 함께 개발하여 2015년 제안한 것으로, 지속가능한 사회 전환을 위한 디자인 분야입니다. 전환 디자인은 기존의 서비스 디자인이나 사회혁신 디자인보다 거시적 관점을 취하고 있으며, 현재의 시스템이 바람직한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미래의 가치와 비전을 디자인 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조금 더 덧붙인다면, 사람들의 가치관, 라이프스타일, 사회적 구조의 변화 전반을 함께 다루는 것이지요. 전환 디자인은 가장 최근에 발전된 분야인 만큼 현대 사회의 맥락을 잘 반영하고 있기에 시스템 수준에서 문제를 다루면서도 가장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접근을 함께 하는 특징도 있습니다.
디자인 다시 생각하기
오늘 소개한 것들 이외에도 다양한 디자인 방법들이 미래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서로 다른 개념을 연결하고, 사회 저변에 가려진 것들을 시각화 하고, 사람들 대화를 촉진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많은 나라들이 디자인을 미래를 준비하는 전략을 수립하기 위한 주요한 방법으로서 사용하고 있으며, 정부 산하의 기관을 두고 장기적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기술과 물질 중심의 미래 사회가 아닌 사회적 문제 즉 돌봄과 교육, 정신건강과 시민 복지와 같은 사회적 상상에서 디자인은 중요한 위치를 가집니다. 여기서 디자인은 마케팅의 일환이나 당장 눈에 보이는 미학적인 결과물을 말하지 않습니다. 또는 단번에 문제를 해결해 내는 단발성 솔루션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보다는 연구를 바탕으로 다양한 디자인 방법론을 아우르는 총체적 과정, 관점의 전환, 또는 태도 그 자체에 관한 것일 수 있습니다. 아직 이 분야의 디자인이 국내에서는 많이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속가능한 미래를 생각한다면, 디자인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하고, 연구기반의 다양한 디자인 도구들을 도입하고 개발하여 국내 상황에 맞는 미래 시나리오를 준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참고.
*스페큘러티브 디자인: 최근 국내에 번역된 앤서니 던의 <스페큘러티브 디자인: 모든 것을 사변하기> 에서는 사변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고, 제프 멀건의 책 < 사회적 상상은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가> 에서는 '탐색 디자인' 이라고 번역되었다.
**예테보리는 backcasting 외에도 다양한 디자인 방법론을 도시 전략을 세우는 데에 사용하고 있으며, 현재 2030년 기후중립을 목표로 하여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다.(추후 포스팅 예정)
앤서니 던 외. (2024). 스페큘러티브 디자인: 모든 것을 사변하기. 안그라픽스.
제프 멀건 외. (2024). 사회적 상상은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가. 착한책가게.
Bibri, S. E. (2018). Backcasting in futures studies: a synthesized scholarly and planning approach to strategic smart sustainable city development. European Journal of Futures Research, 6(1), 1-27.
Irwin, T., Tonkinwise, C., & Kossoff, G. (2022). Transition design: An educational framework for advancing the study and design of sustainable transitions. Cuadernos del Centro de Estudios en Diseño y Comunicación. Ensayos, (105), 31-7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