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반년 간 생각했던 것들
지난해 11월 2일, 아내의 치료를 위해 회사에 급히 휴직을 냈다. 이후 한 달 뒤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고 후로 벌써 반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시간 참 잘 간다. 간다는 말보다 흐른다는 표현이 더 적합한 것 같다. 아니 그보다 밀려왔다는 게 더 맞는 것도 같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모든 것이 내가 모르는 어떤 크신 이의 계획 아래 있었기만을, 그저 바랄 뿐이다.
올해 2월까지 약 3개월 동안은 정말 하루하루 편안히 숨 쉬는 것조차 힘들고 버거웠다.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머릿속에서 생각을 지우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 와 중 남겨진 현실의 일들을 처리하러 다녔다. 아내가 가지고 있던 7개 은행의 계좌와 보험, 증권 등을 정리하기 위해 매일 은행, 보험, 증권사를 찾아다녔다. 증빙을 위한 기본 서류라는 게 있다. 사망진단서와 가족관계 증명서, 기본증명서, 혼인관계 증명서 같은. 출력을 할 때마다 '사망' 이란 단어를 눈으로 계속 확인하게 된다. 이 서류를 들고 창구 앞에 앉으면 또 가장 하기 싫은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 '안녕하세요, 저희 아내가 사망해 은행 계좌를 정리하러 왔습니다. 서류는 여기 있고요. 전 남편이에요.' 정말이지 끔찍하고 잔인한 시간들이었다. 은행 시스템이 아무리 잘 갖춰 있다 해도 이렇게 젊은 사람이 미성년의 자녀를 두고 생을 마감하는 일은 흔치 않다. 그래서 창구의 행원들도 관련 규정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대다수다. 계속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은행 한 곳에서 두세 시간을 보내는 일도 허다했다. 아니 통장에 돈도 없으면서 계좌는 또 왜 이리 많이 만들었던 건지. 미안함과 원망의 마음이 섞여 나는 완전히 지쳐버린다. 은행 한 군데 다녀오면 하루가 끝난다. 그렇게 또 시간들을 흘려보냈다.
3월이 되자 조금씩 내 상황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장 경제적인 것들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회사를 다닐 수는 있을까. 못 다닌 다면 무얼 하며 살아야 할까. 아이들은 어떻게 키우고 대하는 게 맞을까. 나는 잘하고 있는 걸까. 아직 젊은데 계속 이렇게 혼자 살 수는 없다. 누군가를 다시 만날 수는 있을까. 온갖 물음들이 생각을 모조리 지배했다. 특히 이제 곧 회사와 약속한 복직일, 5월 2일이 다가온다. 회사를 어떻게 할 지에 대한 고민이 가장 컸다. 돈은 벌어야 하는데 아침저녁 아이들을 내 손으로 챙기며 정상적인 직장생활을 하는 것이 가능할까. 물론 이 코로나 상황을 핑계로 재택을 하며 슬렁슬렁 일을 한다면 못 할 것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리고 그렇게 대충 하는 건 내 성향에도 맞지 않았다. 그래서 회사를 다니는 건 어렵겠다 싶었다.
그러던 중 혼자 고민하지 말고 주변에 도움을 구해봐야겠단 생각을 했다. 그래서 sns에 여러분의 지혜를 빌려달란 글을 올렸다. 다행히 생각보다도 많은 분들이 다양한 조언을 주셨다. 일과 관련해서도 썩 괜찮은 제안들이 있었다. 돈이 필요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도 있고, 오랫동안 내가 꼭 해보고 싶었던 것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당장 하고 싶은 것과 언젠가 해봐도 될 것 같은 일로 나뉘더라. 걔 중엔 회사를 다니며 해 온 브랜딩, 마케팅, 홍보와 관련된 일들도 있었지만, 늘 손에 쥐고 있던 패션과 관련된 일, 글쓰기와 사진 등의 그간의 노력들도 도움이 된 것 같았다. 그렇게 4월부터 내가 하게 된 일들을 세어보니 7가지쯤 되더라. 이걸 다 챙기려니 적어도 30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 써야 했고 잠을 현저히 줄여야 했다. 어차피 잠이 오지 않아 잘 자지 못하던 시기였다. 또 뭐 하나 시작하면 제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니 대충 하긴 싫었다. 그래서 하루하루를 가득 채워 정말 열심히 살았다. 그렇게 5월까지 두 달을 보내니 몸에 안 좋은 신호가 왔다.
잠을 못 자니 면역이 떨어지고 감기에 걸렸다. 그 상태로 운동을 할 수 없으니 컨디션은 더 안 나빠졌다. 몇 가지 일은 꽤나 스트레스였고, 그 와 중 방송국 2곳에서 섭외가 왔는데 촬영을 진행하는 모든 과정이 대단히 버거웠다. 두통이 생겨 병원을 찾았더니 전두동에 물혹이 생겼다고 한다. 통증이 계속되면 눈썹 위에 구멍을 내어 제거하는 수술을 해야 한다는 얘기도 대학병원에서 들었다. 이 상황에 일주일 입원은 정말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다 6월이 됐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몇 가지 일들이 순식간에 정리가 됐다. 꽤나 열심히 준비했고 마음을 쏟았던 유튜브 관련 일들이 전부 중단됐다. 모 스타트업과 하던 일도 테스트를 멈추고 조금 돌아가기로 한다. 당연하지만 수입이 꽤 줄었다. 반면 내 시간은 늘어났다. 그래서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잠도 충분히 자려 노력했다. 조급함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돈 좀 못 벌면 어때 라고 생각하며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여유롭게 보내기로 다짐했다. 다행히 두통이 사라졌다. 수술도 미뤄졌다. 일로서 해야 하는 것 중 내가 하고 싶은 것들만 남겼다.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인터뷰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이런 일들이 조금 더 늘어나도 좋겠단 생각도 해본다. 그리고 여행을 더 많이 잡기 시작했다. 6월의 경주, 7월의 고성 그리고 강릉. 그러다 결국 8월엔 2주 정도를 강원도에서 보낼 생각까지 하게 됐다.
최고 성수기에 인기 여행지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건 써야 하는 돈과 정확히 비례하더라. 수익이 줄어든 상황에서 돈을 더 써야 하는 결정을 내린다는 게 쉽진 않았는데 이런 시기가 또 올까도 싶었다. 만약 유튜브 관련 일들이 중단되지 않았다면, 하던 일들이 더 잘 굴러갔으면. 나는 절대 시간을 빼서 여행 갈 생각을 못 했을 거다. 그래서 돈이 들어도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경험해보니 모든 것엔 불완전하나 움직여야 할 때가 있더라. 완벽한 타이밍을 기다리는 것보다 그 불확실성 속에 몸을 맡기는 게 때론 더 좋은 결과로 이어지더라.
그렇게 나는 점차 나아지고 있다. 편안히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웠던 날들로부터 조금씩 내 호흡을 찾아가기까지. 고요히 나를 들여다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기도, 쉴 새 없이 웃고 떠들며 낯선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어느 한적한 모래사장에 작은 돗자리 하나 깔고 누워 아름답게 번지는 노을과 그 틈으로 날아가는 어느 비행기의 궤적을 눈으로 좇는다. 그렇게 나도 선 하나를 긋고 살아가는 것 같단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선 끝이 누군가에게 닿아 그의 마음을 움직이는 삶을 살길, 기왕이면 따뜻한 손길처럼 느껴지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