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이 막혀 차 오를 때, 나는 무언가 써야만 했다
브런치는 오랜만에 들렸다.
글을 쓰지 않았던 것은 아니고 한 동안은 인스타그램에서 짧은 호흡으로 글을 남기고 있었기에. 다만 그럼에도 긴 호흡의 문장들이 분명히 필요할 때가 있는데 요즈음이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전문은 여기에. 앞으로도 종종 더 노력해서 다시 써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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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머리속에서 뒤엉킬 때 나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숨이 막힌다. 숨이 막힌다는 건 말 그대로 숨이 잘 안 쉬어져서 일종의 호흡곤란을 만드는 것.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작년엔 이런 경우 보통 글을 썼던 것 같다. 뭐랄까. 떠오른 채 공중에서 부딪혀 깨져버려 사방에 튀어 엉키고 섞인 생각들을 두고. 누군가 퍼즐을 맞추듯 니가 먼저, 너는 그 다음, 먼저인 친구는 이런 부분이 문제이니 이렇게 두고 끼워 맞춰주는, 그 모든 걸 정해주는 거랄까. 한참을 뭐라도 쓰다보면 뭐 대단한 건 아니어도 그 과정 자체가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된다. 다시 공기를 코로 들여 내 안에 쌓인 먼지를 씻어 뱉어내게 하는 그런 시스템.
최근 두어달. 각 잡고 앉아 내 마음의 소리에 그래 그랬구나 할 시간이 전혀 없었던 것 같다. 지금 느끼는 답답함이 전부 여기서 왔다고 말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커피를 내리듯 마음의 소리를 한방울 씩 똑똑 떨어뜨려 글로 내려 모아뒀다면. 글쎄. 지금보다 조금은 더 편안한 마음이지 않았을까? 아니었을까.
재작년 12월 이래 나는 내 삶을 지키려 부단히도 애썼다. 그보다 더 이전의 1년 반은 가정을 지키려 나를 혹사시켰다. 더 오래 전으로 가본다면 처가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는 그 무렵. 나는 나를 지웠다. 나로써 사는 삶을 포기했다. 대신 나의 희생으로 얻어질 것들을 생각했다. 근데 이건 정말 이타적인 행동이었을까? 생각해보면 이 또한 나를 위한 결정이었다. 나의 자세나 태도로 인한 누군가의 불편함과 또 다른 배려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그저 나를 위한 선택이었다. 그 때도 내 삶을 지키려 부단히 애썼던 것 뿐이었다.
나는 좋은 부모인가? 부모는 아이들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가? 부모의 헌신은 당연한가? 이 짐을 나누지 못한 채 오롯이 이고 지고 가는 나의 마음이 갈수록 식어가는 걸 발견한다. 나는 아이들을 사랑하는가. 사랑한다. 그럼 그들을 위해 나의 시간을 더 쓸 수 있는가? 그러고 싶지 않다. 나는 나에게 더 집중하고 싶다. 나만 생각하고 싶다. 아무도 나를 기억하거나 생각하지 못하는 곳에 가고 싶다. 내 안에 어딘가 뚫려 있는 그 공간을 다시 메우고 채워보고 싶다. 매일 그저 눈으로 담고 생각하는 걸 글로 쓰고 싶다. 그것 외에 아무것도 안 한 채 한 1년만 보낼 수 있다면 어떨까. 솔직한 마음이다. 이게 지친거라면 그래 많이 지친것 같다. 어떻게 회복해야 하는 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아이들을 보며 넉넉히 웃지 못한 지 사실 좀 됐다. 잘 안 된다.
지난 해 어느 날 즈음, 나는 나에게 선언했다. 껍데기 같은 종교생활은 하고 싶지 않다고. 의무감으로 봉사하고 헌신하고, 뭔지도 잘 모르겠는데 어중간하게 믿는 척 하며 거룩한 척 살고 싶지 않았다. 믿음이 정말 실체였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정말 사실이라면. 하나님이란 신이 존재하고, 나를 속속들이 다 알고 세상을 다 만드신 그 전능한 분이 나를 너무 사랑하셔서, 나에게 가장 좋은 걸 주신다는데 그게 정말 맞다면.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그분의 계획 혹은 섭리 아래, 개미같은 나는 미쳐 알지 못하는 큰 그림 아래 있는거라면, 나는 앞으로 정말 더 행복해져야만 해, 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을까. 결국 나에게 더 좋은 거라면. 그래 나는 더 행복해야 한다. 그래야 나는 내가 살아내는 이 삶으로 내가 믿는 신의 존재를 다른 누군가에게도 너도 믿어봐, 라고 말 할 수 있는 근거를 얻을 수 있게 된다. 내 마음의 평안으로 만족으로 거짓없이 증명하며 살아냈으면 좋겠다. 이게 안 되면 나 스스로도 그리고 타인에게도 내가 믿는 믿음의 실체와 신앙이란 것들을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될까.
그래서. 나는 지금 더 행복해지고 있나. 행복해지는 과정 중에 있는걸까. 행복으로 나아가고 있는걸까.
22년 10월 16일이다. 벌써 그렇다. 찬 바람이 불고 푸른 잎이 붉고 노랗게 물드는 이 시기. 의식하며 살고 있지 않지만 무의식에서 오는 불안함과 두려움이 나를 짓누른다. 그게 지금 내가 느끼는 마음 졸임의 원인일까.
쉽게들 던지는 아이들 보며 살란 얘기. 가장 듣기 싫다. 그게 되는건가? 난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그렇게 살아오지도 않았다. 그리 살 자신도 없다. 어쩌면 너희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내가 행복해야 너희도 행복할거라 생각한다.
올해의 남은 몇달 그리고 내년 초까지. 나는 또 다른 변화 앞에 서 있다. 그 모든 것들이 나는 두려운걸까. 불안한가. 왜 불안하지? 선하신 하나님이 늘 가장 좋은 걸로 주신다는데 왜 불안하지. 못 믿어 불안할까. 나의 믿음이란 건 고작 이런거였나.
그럼에도 내가 찾을 수 있는 답은, 찾고 싶은 답의 영역은 늘 나의 신앙 안에 있다.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면 지금 숨쉬는 나의 삶 조차 나는 설명 할 수 없다.
결국 무식하게 두서없는 이 글의 목적은 내일을 위함이다. 작년엔 하루만 보고 살았다. 오늘 하루 붙어 있는 숨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오늘만 잘 넘기자 싶었다. 그 마저도 안 될 땐 1시간만 10분만 지금 딱 이 1분만 넘겨보자도 했었다. 이제 그 단계는 조금 넘어서지 않았나 싶다. 나는 내일을 생각하고 싶다. 행복하게 웃는 나의 내일을 꿈꾼다. 이런 일을 겪고도 이렇게, 아니 더 행복하게 잘 살아가는 나를 꿈꾼다.
다만 나의 영역과 그 분의 영역이 있을 것도 같다.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앞으로를 위한 거창한 계획 같은 건 그런 건 나의 영역은 아닌 것 같다. 나는 그저 오늘과 내일을 위해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일들을 충실히 해낸다. 그럼 그 다음은 그 분의 영역이겠지.
최근 내가 힘든 건 이 지점이었다. 주어진 일을 충실히 하는 것. 이게 버거워졌다. 주어진 일보다 다른 걸 더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생긴 파장과 진동이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밀쳐내고 있다. 판단이 흐려졌다. 도파민 시스템의 완연한 붕괴다. 좋고 나쁨의 판단조차 쉽게 되지 않는다. 정확히 거기에 서 있다. 그래서 자꾸 길을 벗어나고 싶나보다. 한 발 슬쩍 옆으로 말고, 완전히 딛어내 다른 곳으로 뛰어가고 싶다.
나는 나무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누군가 와서 편히 쉬고 볕을 피하고 즐겁에 노닥일 수 있는 그런 자리를 만드는 나무. 나무는 많은 역할을 한다. 하지만 자유롭진 않다. 나무인게 참 좋았다. 나무가 더 자라면 밑둥을 잘라 배를 만들면 좋겠다. 강물의 흐름을 따라 어디로든 같이 떠 밀려 내려가고 싶다. 지금은 그저 자라는 시간. 흐르는 강물 옆에 심기어 물을 머금고 자라며 쪼개지고 갈라지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