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시작은 기록하고 싶은 욕구에서
서른책방에서 진행한 6주 독립출판 수업을 들었다.
5주 차까지 원고 마감해서 6주 차에 샘플북을 받고 피드백하는 걸로 수업은 종료된다.
바로 어제가 5주 차 수업 후 원고 마감일이었다.
독립출판한다고 지난주까지 약속도 안 잡고 시간 날 때마다 글을 썼다. 일단 수를 채운다는 생각으로 쓰기 시작했다.
내가 만들 책은 지난겨울 동생들과 다녀온 미국 여행이야기다. 책 만들면서 세어보니 15개의 미술관을 다녀왔는데 이 이야기를 적고 싶어서 쓰게 됐다.
이 기획을 하게 된 이유는 미국에 가기 전에 갔다 와서 어떤 식으로든 결과물이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에서 출발했다. 그 당시 여행 브이로그를 보면서 여행 기록에 눈을 뜨면서 나는 어떤 매체로 기록할 수 있을까 둘러봤다. 그때 봉현작가님도 알게 되어서 2년 간 유럽 여행 그림 기록을 담은 [나는 아주, 예쁘게 웃었다] 책과 작년 도서관에서 빌려 본 [뉴욕규림일기]가 떠올랐는데 나에게 그림은 여전히 숙제여서 그림으로 하면 부담스러울 것 같았다. 방을 둘러보니 속초에서 혼자 여행하다 문우당서림에서 사 온 [A Paris] 책이 꽂혀있었다. 두 자매가 다녀온 파리여행기인데 제목만 보고 펼쳤는데 내용도 마음에 들어서 산 책이었다. 이 책처럼 이렇게 대단하게는 아니더라도 나도 글로 여행을 기록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생각은 했는데 출국일이 다가올수록 가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여행 가서 일기만 써봤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글을 써본 적이 없었다. 여행 직전에 사람들을 만나면 “여행 다녀와서도 나에게도 만족스럽고 다른 사람에게도 보여줄 수 있을 기록물을 가져오고 싶은데 방법을 잘 모르겠다고 말하곤 했다. 기억나는 반응은 두 가지였다. “여행인데 아무것도 하지 말고 푹 쉬다 오는 것도 좋겠다.”, “여행 에세이도 다 미리 기획을 하고 가는 거다. 아무나 쓰는 게 아니다.”
내가 뭘 가져오겠다고 했을 때 좋아한 건 우리 아빠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에게 그냥 쉬어도 된다고 말한 사람들은 모두 J였다. 우리 아빠는 P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여행을 못 즐기고 올까 봐 그렇게 말한 것 같다. 그러나 저러나 나는 기록물을 가자고 싶었기 때문에 가기 직전까지 고민하다가 그만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강추위에 지고 말았다. 시차적응도 오래 안 걸리곤 했는데 이번엔 자꾸 새벽에 깨고 춥고 움직이기도 싫었다. 여행 가면 없던 힘도 생기고 평소다 300% 부지런하게 사는데 다 옛 모습이었다. 그리고 대학생 때부터 해외여행을 가면 꼭 매일 일기를 썼는데 이번엔 일기도 못 쓰고 잠들었다.
평상시 같으면 영상도 많이 찍었을 텐데 그냥 사진만 저장용으로 찍고 말았다.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여름에 하는 여행을 좋아한 거였나.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지 내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건데 어째 주변 사람들의 말처럼 그냥 쉬기만 하는 여행이 되었다. 그래서 이번 여행이 끝나고 결과물을 꼭 들고 오겠다는 생각도 흐려졌다. 여행이 끝나고 사고가 달라졌다거나 이런 부분도 없었다. 여행에서 더 이상 재미를 느낄 수 없을 만큼 여행이 흔한 경험이 된 건가? 예전에 여행만 하면 날아다니던 모습이 사라져서 아쉬움이 남았다.
그렇게 여행을 기록하겠다는 걸 다 잊고 있었는데 이게 다시 생각 난 건 여행 다녀오고 8개월이 지나 에리카팕님 강연을 들었을 때다. 이 강연도 봉현작가님의 [봉현일기]를 통해 알게 되었다. 봉현작가님 강연이 3시부터 시작되어서 신청하려고 하는데 그전 시간에 에리카팕님 강연도 같은 장소에서 하길래 멀리 가는데 일찍 가서 2번 다 듣고 오자고 신청했다.
강연 장소는 서울아트책보고였고 에리카팕님 강연에서 나는 지금의 내가 하는 일의 뿌리가 되는 말을 듣게 된다.
“저는 독립출판 수업 들은 게 지금까지 한 사교육 중에 최고의 아웃풋이었어요.”
독립출판으로부터 여기까지 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쉬는 시간에 밖에 나가 아트책보고 북카페에 들렸다. 거기서 운명처럼 여행책 코너로 갔다. 독립출판한 여행책들이 많았는데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출판하고 달랐다. 독립출판물이라는 것을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다. 각자의 생각이 가득 담긴 책을 보니까 새로운 세상에 온 것 같았다. 지금까지 못 한다고 생각했던 일들 기성출판이 아니라 독립출판에서는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오랜만에 도파민을 느낀 것 같다. 돌아와서 에리카팕님 강연을 마저 듣고 봉현작가님 강연에서 그림엽서도 그렸다. 거기서도 휴스턴에 있는 나를 그리면서 여행을 복기했다. 집에 가기 전에 북카페에서 아까 본 여행 독립출판 책을 사고 집으로 왔다. 돌아와서 동생에게 말했더니 어디 소풍 다녀온 어린아이 같다고 했을 정도로 신났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소설 같은 이야기가 있다. 에리카팕님 강연을 들은 다음 날 서른책방에서 독립출판수업 수강생을 모집한다는 거였다. 마음은 바로 시작이었는데 당시에 창업 컨설팅을 받고 있었는데 에너지가 분산될 것 같다고 해서 고민했다. 마지막날까지 고민하다가 1자리 남았다는 말을 듣고 수업 하루 전 신청했다. 그리고 5주가 지나서 마지막 수업만 남겨두고 있다.
그 사이에 못 마시는 커피를 마시며 디카페인을 카페인만큼 마시고 안 먹던 야식을 먹으며 트러블 폭발하며 원고를 마감했다. 내 원고는 pdf상태로 지금 인쇄소에 가있다.
절대 못할 것 같은 일이, 꿈만 꾸던 일이 생길 때가 있다.
나에게는 그게 글이었고 출판이었다.
창업컨설턴트의 만류처럼 나는 글 쓰면서 창업 준비는 거의 손을 놓았지만 이제 책이 나오니 지금부터 또 하면 내가 책을 만든 것처럼 대표가 되어있을 것이다.
글을 쓰고 싶었고 나의 기록을 출판하고 싶었던 분들에게 독립출판은 정말 추천한다.
수업만 따라갔더니 책이 나온다. 이번에 같이 동기 기수분들도 다 완성했으니 다들 할 수 있을 것이다.
꿈은 꿈일 때 아름답지만 이루면 더 황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