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하는 송운의 낡은 빌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송운은 벽에 붙은 거대한 종이를 가리켰다.
“잘 들어요, 월하 씨. 계약서에 명시된 대로 ‘사적 선 긋기’가 가장 중요해요.”
벽지에는 굵은 글씨로 <동거 10대 수칙>이 적혀 있었다.
1. 사적인 공간 침범 절대 금지 (각자의 방 사용)
2. 신체 접촉 금지 (하이파이브 포함)
3. 야식과 술자리 요청 금지
4. 운명론 발언 횟수 제한 (1일 1회)
월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나는 당신의 법칙을 존중하겠소. 다만, ‘운명론 발언 횟수 제한’은 좀 가혹하오만.”
“가혹하지 않아요. 1회만 허락한 것도 운명적으로 관대한 거예요.”
송운은 작은 방을 가리켰다.
“저 방 쓰세요. 그리고 옷을 좀 갈아입어요. 그 겉옷, 냄새나요.”
월하는 방으로 들어가 살펴봤다. 그는 곧바로 화장실로 향했다. 옷을 벗고 수도꼭지를 틀자 차디찬 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게 무슨 신성한 의식이오? 왜 물을 데우는 기운이 없단 말이오!”
“무슨 소리예요! 보일러 틀 줄 몰라요? ‘온수’라고 쓰여 있는 버튼을 누르세요!”
송운은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다가 월하의 방 쪽으로 달려왔다. 그녀가 보일러 버튼을 눌러주자 잠시 후 따뜻한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것이 인간의 신력이오? 놀랍소!”
“이건 과학이거든요, 월하 씨.”
목욕을 마친 월하는 송운이 건네준 새 옷을 입었다. 새 옷 덕분에 그의 비현실적인 외모는 더욱 빛을 발했다. 송운은 애써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며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송운은 밥을 차렸고 월하는 밥그릇에 담긴 ‘밥’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이것은 무엇이오? 흙이나 정기가 아닌 낱알의 집합이오?”
“쌀이잖아요! 그걸 모르다니. 아니, 정말 당신 어디서 왔어요?”
“나는... 그대가 말하는 ‘운명 따위는 없는 세상’에서 왔소.”
월하는 밥을 먹으며 송운의 눈을 깊숙이 응시했다.
“아가씨. 내게 ‘스펙’이 없다고 했소만, 사실 나에게는 세상의 모든 인연을 본 통찰력이 있소. 내가 그대를 도울 수 있소.”
송운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됐어요. 나한테 필요한 건 통찰력이 아니라 통계와 매출이에요. 그리고 내 이름은 송운이에요. 아가씨 말고.”
“송운... 아름다운 이름이오. 마치 밤하늘의 구름 같소.”
송운은 순간 포크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녀는 그동안 수많은 남자를 봐왔지만 월하의 칭찬에는 어떤 계산이나 목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순수함이었다. 그의 비현실적인 외모와 순수한 시선이 합쳐지니 송운의 냉철한 철벽에 작은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 그런 느끼한 칭찬 하지 마세요. 10대 수칙에 불필요한 감정 유발 금지 조항 추가해야겠네요.”
밤이 되었다.
월하는 자신의 방에서 송운은 거실 소파에 앉아 다음 날 매칭 파티의 자료를 검토하고 있었다.
새벽 1시.
송운은 너무 피곤한 나머지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자료가 흩어지고 머리카락이 얼굴을 덮었다.
월하는 잠든 송운을 발견하고는 잠시 멈춰 섰다. 그는 송운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낮에는 날카롭던 그녀의 표정이 잠든 사이에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고단해 보였다.
그는 송운에게 다가가 흩어진 자료를 조심스럽게 모았다. 그리고 소파 구석에 던져져 있던 담요를 들어 그녀의 어깨까지 덮어주었다.
'저 여인은 운명을 믿지 않는다고 했지. 하지만, 자신의 고독을 숨기지 못하고 깊이 잠든 모습은 내가 신계에서 봤던 그 어떤 운명적인 짝보다도 가장 외로워 보이는군.'
그는 문득 송운의 손을 쳐다보았다. 붉은 실은 보이지 않았지만 월하의 손이 그녀의 손 가까이에 닿았을 때 아주 미세하고 따뜻한 기운이 그의 손끝을 스쳤다.
월하는 그 기운에 놀라 손을 떼었다.
'이것은...?'
그는 자신에게 신력이 없음을 알지만 송운과의 접촉에서 느껴진 이유 모를 끌림에 혼란스러워했다. 그것은 논리나 통계로는 설명할 수 없는 운명의 시작처럼 느껴졌다.
월하는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송운은 잠결에 담요의 따뜻함을 느끼며 무의식적으로 살짝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