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롭던 오후 2시,
영업부 김 부장은 새로운 마케팅 전략회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날카롭게 전화벨이 울렸다.
김 부장의 촉이 벼린 날처럼 솟구쳤다.
‘사고다.’
아니나 다를까 수화기 너머에서는 강 대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판교에서 부산으로 향하던 물류 차량이 천안 부근에서 원인 미상 고장으로 멈춰 섰습니다. 이 물량은 오늘 23시 선적 예정인데 차질이 예상됩니다.”
김 부장은 순간 아득해졌다.
그러나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옆에서 통화를 함께 듣고 있던 이 과장에게 말했다.
“긴급상황대책 TF 소집해.”
그런데 김 부장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이 과장은 이미 사내 인트라넷의 긴급 통지 양식에 내용을 작성하고 있었다.
김 부장의 지시가 떨어지는 순간, 이 과장은 작성해 둔 화면을 김 부장에게 보여주며 승인을 요청했다.
긴급 TF 운영 요청
대상 : 비서실, 지원부, 물류부, 해외부
상황 : 금일 23시 부산 선적 예정 물량, 천안에서 차량 고장으로 정지. 제시간 도착 및 선적 불가 예상
대처 : 신규 물량 대체 선적 검토
정확했다.
김 부장은 결제선을 기다리지 않고 이 과장 자리에서 곧바로 승인했다.
이 회사에는 몇 년 전 물류 유통 사고 이후 만들어진 회사내규가 있었다.
어느 부서든 부장급 이상 간부가 비상 상황이라고 판단하면 즉시 사고대책 TF 소집을 요청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요청이 발동되면 관련 부서는 어떠한 이의 제기 없이 최우선으로 대응해야 한다.
다만 과도한 행사를 막기 위해 부서별 2주 1회로 제한되어 있었다.
상황이 해결되면 2주 이내 사후 평가회의를 열어
정말 긴급한 상황이었는지, 대응은 적절했는지, 개선점은 무엇인지 평가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제도를 몇 년 운영하면서 회사가 얻은 가장 큰 변화는 하나였다.
최초 상황 보고 시
지휘부와 임원의 재질문을 금지한 것.
지금은 따져 묻는 시간이 아니라
움직여야 하는 시간이라는 원칙 때문이었다.
긴급 요청을 받은 각 부서는 즉시 움직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업부 이 과장에게 처리 결과가 회신되기 시작했다.
비서실
보고 완료. 추가 지시 없음.
선적사 및 해운사 비서실 연락 완료.
필요시 출항 일정 연기 가능.
지원부
긴급 가용 차량 7대 확보
(판교 2, 천안 3, 부산 2)
기사 대기 중.
신규 적재 물류 위치 확인 즉시 출발 가능.
각 창고 이동 예상 시간 15~25분.
물류부
부산 창고 예비 물량 우선 선적 가능.
판교 물량은 오늘 야간 운송 후 순차 선적 가능.
해외부
선적 불가 상황 대비 예비 출항 일정 확보.
수탁 기관과 예비 일정 공유 완료.
각 부서의 신속한 대응 상황을 정리한 이 과장은
김 부장과 함께 즉시 상황 대처에 들어갔다.
그리고 강 대리에게는 고장 난 화물차 위치로 즉시 출동하도록 지시했다.
“현장 상황 직접 확인하고 지휘해.”
강 대리는 천안으로 향했다.
그날 밤,
23시 부산 선적은 결국 예정대로 이루어졌다.
고장 난 차량은 결국 현장에서 수리되지 못했지만
부산 창고의 예비 물량이 먼저 선적되었고
판교 물량은 야간 차량으로 이동해 다음 선적에 맞춰 처리됐다.
사고는 있었지만
차질은 없었다.
그 일이 있은 다음 주 사후 평가회의에서 한 임원이 말했다.
“이번 대응이 빠를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김 부장은 잠시 생각하다가 짧게 답했다.
“각 부서 담당자가 시의적절하게 잘한 것도 있지만 긴급상황대처 TF 시스템이 조직을 움직이게 만들었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긴급 상황에서 조직을 멈추게 하는 것은
사고 자체가 아니다.
보고, 승인, 재질문, 책임 회피 같은
불필요한 과정들이다.
그래서 이 회사는
비상 상황에서 단 하나만 남겨두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하라.”
좋은 조직은
사고가 없는 조직이 아니라
사고가 나더라도
기능이 멈추지 않는 조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