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sbon, Portugal 01
그러니까, 나는 스무 살의 마지막 날에 비행기를 탔다. 앞에 서스럼없이 적어내려간 말들이 너무나 많아서 몽땅 지워버렸다. 대신 앞으로 쓰여질 문장을 통해 내 마음이 조금이나마 그려졌으면 좋겠다. 태어난 이후 쭉 같은 지역, 같은 동네에서 자라난 나는 주변에서 특별한 자극을 찾기가 어려웠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다녔던 학교와 주변 건물이 약간씩 달라졌을 뿐, 전체적으로 비슷한 결을 띠고 있었다. 매일 걷는 길, 엄마와 함께 장을 보는 마트, 친구들과 만나는 장소의 특색은 그 색이 바래진 듯 익숙하게 느껴졌다.
고등학교 3년 내내 미대 입시를 준비하며 다른 친구들처럼 매일 공부하고, 그림을 그리고, 미술 봉사활동에 전시회도 꼬박꼬박 다니며 그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 결국 열심히 노력한 끝에 미대생이 되었고, 하나의 합격증처럼 스무 살을 맞이했다. 왠지 특별해 보이고, 나만의 색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나이. 동시에 집에서 멀리 떨어진 대학교에 합격한 덕에 새로운 환경에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갓 구운 빵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듯 그렇게 마음속 설렘도 피어올랐다.
영상과에 진학하고 영화의 기초부터 차근차근 배워나갔다. 친구들과 함께 영상을 만들며 생각을 공유하고, 각자의 관점을 들여다보며 순도 100%의 즐거움 가득한 한 학기를 보냈다. 세상에는 참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배울 게 가득하다는 것을 느끼자,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싶은 욕망이 마음속에서 꿈틀거렸다. 내가 생각하는 어른이란 자신을 돌볼 수 있는, 내면이 단단한 사람이다. 새로운 경험을 통해 쌓인 생각과 감정은 그 누구도 만들어줄 수 없는 하나의 도구라고 생각한다.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매미가 큰 소리로 쩌렁쩌렁 울던 7월의 여름, 상수역 근처 카페에서 항공권을 덜컥 예매했다. 모아온 돈과 환불되지 않는 리스본행 비행기를 맞바꾼 순간.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지 않나. 모르는 게 한가득했지만 용기 하나도 그에 걸맞게 가득했다. 그렇게 멀었던 꿈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른 아침, 커다란 캐리어 하나를 끌고 한 손에는 목 베개를 든 채 인천공항에서 수속을 밟았다. 공항은 조용한 분주함과 떠들썩한 차분함으로 가득했다. 얼그레이 스콘을 하나 먹으며 사람이 가득한 탑승동에서 기다렸다. 푸른 하늘을 담아낸 커다란 창은 이륙하는 비행기를 종종 그려내고 있었다. 저마다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기대를 눈치채기라도 한 건지, 무척이나 파랗고 맑았던 하늘. 그 순간 탑승 안내 방송이 나오고 닫혀있던 게이트가 열렸다.
장장 12시간의 비행. 처음 떠나는 유럽. 혼자 떠나는 여행. 명확하지 않은 마음이 몽글하게 부풀어 올랐다. 한국은 해가 바뀌었는데 나는 아직 12월 31일에 머물러 있다. 아직 8시간은 더 가야 경유지인 파리에 닿을 수 있다. 유재하의 노래를 들으며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을 바라보니 어딘가 마음이 더 붕 뜨는 느낌이다. 그렇게 잔뜩 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데 반가운 기내식이 찾아왔다. 소고기와 으깬 감자, 빵, 치즈를 곁들인 샐러드, 버터, 그리고 귀여운 조각 치즈. 옆에 앉은 여자분과 드문드문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의 눈빛, 말투, 태도에는 단단함이 깃들어 있었다. 나보다 10살은 더 많은 나이인데, 그 시간 속에서 만난 경험들이 지금의 그녀를 단단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짧은 대화였지만 분명 무언가를 배웠다. 당장 실행에 옮기기는 어렵겠지만, 당당한 태도로 사람과 상황을 대하자고 마음속에 꼭꼭 새겨 적었다. 스스로가 작게 느껴질 때 꺼내어 되새길 수 있도록.
사람들은 자기만의 경험을 보관하는 서랍장을 가지고 있다. 지금 나의 서랍장에는 채워나가야 할 빈칸이 많고, 그만큼 표현이나 행동에서 미숙한 부분이 많다. 이번 한 달의 시간 동안 많은 경험을 하고 풍부하게 느끼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넓히고 싶다. 어떤 장소에 있는지보다 어떤 마음을 먹고 있는지가 훨씬 중요하다. 지금 마음에서 퐁퐁 터지는 이 불꽃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방인으로서 머무는 시간, 넉넉한 마음으로 한껏 받아들여 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