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에 누워 한참 전부터 응시하는 까만 허공에 고통스러웠던지난 꿈의 잔상이 상영되었다. 깨어서도 끝내 떨쳐지지 않는, 지독한 습관처럼 비집고 들어와 현실의 공간을 잠식하는 상념들. 숨이 막혀 물 밖으로 얼굴을 쳐들듯 몸을 일으켜 창문 블라인드를 열었다.
새벽 네시 반, 파리 13구 어느 외진 골목에 푸른 어둠이 강물처럼 흘렀다. 겉옷을 껴입고 물살에 몸을 던지듯 바깥으로 나갔다. 3월인데도 응달엔 아직 채 녹지 않은 눈이 쌓여있었다.
유리창 너머로는 마냥 적막 같던 바깥의 어둠에 몸을 담그니, 수면 아래서 생동하는 작은 생명들처럼 새벽을 움직이는 소리와 드문드문 길을 비추는 불빛의 파동이 나를 향해 밀려왔다. 한 걸음, 한 걸음 새벽을 가로질러 걸었다. 나를 무겁게 누르던 상념들이 조금씩 씻기며 드디어 숨이 쉬어졌다.
조심스레 떼던 걸음은 점점 빠르고 집요하게 어둠을 거슬러 올라 새벽의 끝을 향해 나아갔다. 강이 흐르고 동이 터 올 파리의 한가운데로.
긴 글로 쓰다가 모두 지운다.
어느 시절보다 높이 행복했다가 수면 아래로 침잠하기까지의 부질없는 이야기, 흔하디 흔한 상실에 관한 과정의 나열, 영원할 줄 알았던 매듭 하나에 나를 지탱하던 많은 것들이 엮여있었다는 걸 미처 몰랐던 무지의 나날을.
풀려버린 매듭 앞에 힘없이 추락한 믿음, 희망, 신앙, 평온, 꿈. 그런 것들과 함께 나도 서있을 힘을 잃고 말았다. 왜 그리 무용하고 연약한 것들에 기대어 있었을까.
다시 일어서 보려고 날개이자 안식이었던 단어들을 붙잡으려 했지만 손에 쥐어지는 건 잔인한 부재의 흔적뿐, 나는 다시 수없이 추락했다. 그럴 때마다 구석에 엎드려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고, 움직이지도 못한 채 몸부림쳐야 했다.
누군가 마주하고, 무언가 듣고, 어딘가 몸을 디디고 있는 순간들이 못 견디게 버거워 나는 마지막 힘으로 몸을 일으켜 달아났다. 그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닿지도 않는 수면 아래로 서서히 잠겨 부유했다.
이제 원망도 기대도 기쁨도 감동도 없이, 신도 사람도 꿈도 아무것도 믿지 않으리.
수면 아래 감정의 진공 상태에서 나는 글 한 줄, 연필 선 하나 쓰고 그릴 수 없었다. 차라리 바깥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여기보다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영영 사라져 버릴 수 있다면. 원망도 기대도 기쁨도 감동도 없이, 신도 사람도 꿈도 물러난 의식 없는 허공이 되길...
시나브로 소망하고 있는 나를 깨닫고 버둥거리며 수면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물기가 어려 흐릿한 시선 너머 뭍에 서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나의 삶 작은 한 조각에도 그 사람의 기도가 머무르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나의 엄마.
삶의 많은 고비를 작은 몸으로 나를 떠안고 힘겹게 넘어선 엄마의 여생을 회한과 고통으로 몰아넣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다시 뭍을 밟고 올라서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로 걸어 들어갈 용기도 내겐 없었다.
없었다, 손을 내밀며 소리쳐 엄마를 부를 힘도.
이렇게 두 발을 물속에 담가 둔 채, 긍정의 가면을 쓴 얼굴을 물 밖에 꺼내놓고 그래도 숨은 쉬며 살아가야 하는 걸까. 시야가 다시 먹먹하게 잠겨갔다.
다시 흐릿해지는 엄마와 그 뒤에 서 있는 몇 사람, 뭍에 남겨진 소중한 것들.
그때 바람이 불어왔다. 뭍을 지나 수면을 스치며 내게로 불어온 바람에는 그리운 어느 시간의 공기가 서려있었다. 다시 눈을 비벼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바라보았다.
모든 먹먹한 것들 뒤로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풀이 파도처럼 너울거리는 언덕과 따뜻한 빛깔로 펼쳐진 붉은 마을을 바라보며 나직한 약속을 건네고 있었다.
"순례자가 되기 위해 돌아올게."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처음부터 거기가 어디인지, 그리고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마음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잊은 적이 없었던, 늘 그립고 애틋한 르퓌. 그리고 그보다 더 그리운 그때의 나.
2년 전 과거에 사는 그 눈은 언덕에서 이어지는 산등성이 평원과 그 너머 보이지 않는 곳까지 이어지는 까마득한 길을 헤아리고 있었다.
믿음, 신앙, 희망, 평온, 꿈으로 빛나는 그 눈을 통해 그 길이 어렴풋이 비쳤다. 다시 시야가 흐려질까 봐 뭍으로 집요하게 나아갔다. 뭍에 손을 짚어 수면 밖으로 몸을 일으켰다. 아직 멈추지 않은 바람이 서늘하게 젖은 내 어깨 위로 그날의 행복과 기대와 약속을 실어 날랐다.
그래, 순례자가 되어 돌아갈게.
두 발을 딛고 숨을 쉬며 살아가기 위해서.
또는,
완전히 추락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걸어온 걸까. 새벽 공기의 물결이 푸르게 고인 큰길에 닿아 가쁜 숨을 뱉어냈다. 걸음을 재촉하느라 잊고 있던 추위가 몰려오며 눈을 감고 달려온 것도 아닌데 번쩍, 하고 시야가 또렷해졌다. 물이 흐르는 소리 또한 생생히 들려왔다. 고요한 파리의 가운데를 세차게 가로지르며, 세느 강이 흐르고 있었다.
한순간도 쉼 없이 깨어 흘렀을 물결에 수채화처럼 번진 파리의 새벽. 투르넬 다리에서 본 시떼 섬의 먼 전경은 어둠이 깊은 음영을 만들어 매만진 노트르담 성당과 어우러져, 푸른 종이에 공들여 그린 펜화처럼 아름다웠다.
그 푸른 종이 위, 상념을 잠시 잊은 가벼운 발자국을 남기며 시떼 섬으로 향했다.
노트르담 성당은 완벽한 여백 속에서 보랏빛 그림자를 커튼처럼 드리우고 단잠을 자는 것처럼 보였다. 파리에 네 번째 와서야 처음으로 단 둘이 마주 보는 시간.
군중 속에서 종탑에 올라 파리의 전경을 눈에 담고 경건하게 그레고리안 미사를 드리고 장미 창의 황홀한 색감에 감탄했던 지난 세 번의 만남은 동경해오던 누군가를 향해 소리 없이 눈을 반짝이는 기분이었다. 문을 굳게 닫고 편안히 눈을 감고 있는 노트르담 곁을 지키고 있는 지금은 말없이 곁에 있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친근한 사이가 된 기분이었다.
노트르담은 가끔 지저귀는 새소리로 말을 걸고, 나는 광장에 발자국을 남기며 타박타박 화답을 하는.
이런 순간이 또 언제 올지 몰라서 포앵 제로에 발을 딛고 여명이 밝기 전 고요한 주변 풍경을 오백 개 정도의 장면으로 나눠 마음에 저장했다.
광장 끝벤치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노트르담을 마주보았다. 걷는 걸 참 좋아하는 나의 두 다리는 자꾸 가라앉으려는 나 때문에 오랫동안 물아래 잠겨 있었다. 그나마 가끔 뭍에 나와 걸었던 순간도 지난 고통을 되새기는 뒷걸음질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나아가는 걸음을 한 두 다리엔 기분 좋은 떨림이 남아 있었다.
처음으로 엄마도, 뭍에 서 있던 사람들도 아닌 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너무 오래 나를 가둬놓았구나. 너무 오래 나를 함부로 대했구나.
미안해.
조금씩 밝아오는 노트르담 광장의 여백을 몇 사람이 무심히 가로질러 갔다. 나도 슬슬 일어나 숙소로 돌아가 르퓌로 갈 준비를 할 시간이었다. 아직 단잠을 자는 노트르담 성당에 안녕을 고하고 등을 돌려 강변을 따라 걸었다. 타박타박. 처음보다 한결 느려진 걸음 곁으로 멀리 떠내려 간 줄 알았던 상념들이 다시 나란히 발맞춰 따라왔다. 조금은 포기하는 마음으로, '르퓌로 가는 기차에서도 나는 한 번씩 가슴을 치며 숨을 고르겠구나...', 곁에 다가오는 상념들을 인정했다.
강을 건너기 위해 생 미셸 다리 위에 오르던 그때, 도시에 가득 차올라있던 푸른 새벽빛이 점점 아래로 가라앉으며, 새벽 물결이 가라앉은 자리에 아침이 햇빛을 쪼르륵 부어 틈 없이 풍경을 채워나갔다. 새로운 막이 열리듯 시작되는 아침.
갑자기 쏟아지는 빛은 어디서 시작되는 걸까.
파리의 동이 터오는 곳을 향해 빛줄기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까지 단잠을 자던 노트르담 성당의 등 뒤에서 세상 모든 빛깔을 품어 하얗게 빛나는 태양의 빛줄기가 강을 가로질러 나를 빛으로 끌어안았다. 뺨을 스치는 칼바람과 분주한 아침의 소리, 나와 나란히 서 있는 미련 많은 상념들까지 그림자를 지우고 무형의 감각으로 하얗게 빛 속으로 스며들었다.
모든 상념이 물러난 자리에 마치 본능처럼, 마음에 넘치도록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한 소망이 간절히 차올랐다.
단잠에서 깬 노트르담 성당이 기지개를 켜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잠들어 있을 때 곁에 머물던 나를 알아보았는지 방긋이 웃으며 나와 같은 소망을 바라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