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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쪽겨울섬 Feb 05. 2021

빈 방 있습니까?

르퓌길에 서다 2. Paris > Le Puy-en-Velay

 2018년 3월 20일







 햇살은 금세 파리 구석구석 아침을 퍼뜨렸다. 곳곳의 여백도 푸르스름한 새벽을 거두고 분주한 아침을 맞이했다. 일찍 문을 연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주문했다. 봉긋한 거품에 초코 가루가 솔솔 뿌려진 카푸치노. 뜨거운 잔을 감싸 쥐고 빨갛게 언 손을 녹이며 생각은 자연스레 앞으로의 길에 대해 흘러갔다.

 오후 한 시, 리옹 역에서 기차에 오르면 50여 일 뒤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외에 아무 예정 없는 하루들을 살아야 한다. 르퓌에서 피레네의 길목인 생장까지 750km. 까마득해 실감이 나지 않는 거리를 9900원짜리 스틱 한 쌍과 10kg 남짓의 배낭, 발에 익지 않은 새 등산화에 의지해 준비 없이 마음을 따라온 몸을 이끌고 걸어가야 한다.

 이상하리만치 걱정도 기대도 없었다. 르퓌에서 생장까지 아무리 까마득하대도 머리에서 마음까지의 거리만큼은 멀지 않을 것 같았다. 어떻게든 가닿을 수 있겠지. 매일 나아가되 천천히, 짐의 무게가 버거워도 두 발로 뚜벅뚜벅 가다 보면 머리에서 마음까지의 거리도 조금은 가까워질 수 있겠지. 때로 문을 활짝 열고 나를 기다리는 자리가 있다면, 빨갛게 언 마음을 녹이고 보살피며 쉬어가야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념의 무게에 쓰러져 더는 일어설 용기와 힘이 바닥이 난다면,

 물 밖으로 나오지 않아도 돼. 가라앉아도 괜찮아.







 



 숙소로 돌아가 짐을 꾸려서 근처 중국계 택배회사에 캐리어를 맡기고, 40여 일 뒤인 4월 30일에 짐을 찾으러 오기로 했다. 캐리어엔 파리에서 일주일을 보낼 옷가지와 화장품, 노트와 필기구가 들어있었다.

 한창 봄의 절정이 지나갈 파리 여행을 위한 옷들은 가볍고 화사했다. 길 위에서 쓰러지면 일어나지 않겠다고 독하게 마음먹으면서도, 길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와 화사한 파리를 누비고 싶은 또 다른 진심을 눌러 넣어서 파리 13 택배회사 창고에 맡겨두고, 길 위의 내 하루하루를 보살필 무게를 배낭에 메고 리옹 역으로 향했다.












 친구들이 생일 선물로 준 배낭은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기차역으로 가는 동안 어깨끈도 제대로 조절할 줄 모르는 주인에게 어색하게 업혀있었다.

 파리로 떠나오기 며칠 전에 자줏빛 배낭을 생일 선물로 사주며 이름 짓기에 분분했던 친구들과 만났었다.한 친구의 이상한 소개팅 얘기에 배를 잡고 웃기도 하고 여행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나누며, 여느 때처럼 사소하고 친근한 수다로 시간을 보냈다.

 "서영아, 걷다가 너무 아프면 그냥 돌아와."

 소개팅 후기를 분개하며 말하던 친구는 평소처럼 장난스레 걱정스러운 마음을 툭 던졌다.

 "어? 괜히 오기 부리다가 여생을 아픈 무릎으로 고생하지 말고!"

 




 가끔은 내 상처를 스스로 헤집어 확인하는 데 몰두하면서도 가까이 서 있는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다는 죄책감이 내 발목에 돌처럼 매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게 자라고 그렇게 살고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사람. 발목에 보기 싫은 것들을 매달고 웃는 얼굴을 수면에 내밀고 있는 사람. 긍정의 얼굴과 말로 무장을 하고 뒤돌아 달아나 침잠한 나의 우울을 물가에 서 있던 사람들은 모를 거라 여기던 무지한 사람.

 하지만 어쩌면 아무도 눈치채지 않게 가라앉고 있다고 믿고 있던 그 순간에도 물가의 사람들은 어서 빨리 나오라고 채근하는 대신에 내가 스스로 걸어 나오길 믿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등을 보이고 있을 때 내 빈자리를 남겨두고 기다려 주었을 마음들이 그제야 하나 하나 보이고 들려와, 친구들과 헤어진 버스정류장에서 저녁 내내 꾹꾹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그럼에도 내 배낭은 친구들이 지어준 이름 대신 '오솔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쇠돌 프랑소와즈 꽃분'은 너무 파격적이다.









 리옹 역에 도착하니 눈물이 고였다. 순전히 어깨가 너무 아파서. 허리와 발목에도 벌써 50일 치 피로가 쌓인 기분이었다. 고작 20분을 메고 이럴진대, 도대체 이걸 떠메고 어떻게 한 달이 넘는 시간을 걷는단 말인가. 지금이라도 무릎 보호대를 장만할까 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기서 무게를 더 늘릴 수 없었다. 철도청 사무실 발권 기계에서 미리 예약한 기차표를 뽑고 소파에 앉아 엄마가 한사코 넣어준 하루견과 한 봉지를 꺼내 먹었다.

 그래, 먹자. 먹어서 무게를 덜자.

 삼 년 만에 마주한 기차역의 낭만은 배낭 무게에 대한 걱정 때문에 저만치서 다가오지 못했다.

 쌩떼띠엔느로 가는 떼제베(TGV:프랑스 고속열차)는 화요일 정오인데도 만석이었다. 예약한 2등석 7번 칸에서 좌석번호를 살피며 내 자리를 찾고 있는데 객실 반대편 문이 열리더니 등산복 차림의 두 사람이 들어왔다.

 만석 기차 칸에서 등산복에 배낭을 멘 단 세 사람은 각자 배낭을 짐칸에 올려두고 자리에 앉으면서도 '혹시...'라는 눈빛으로 등받이 너머 서로를 흘긋거리며 바라보았다. 일행으로 보이는 빨간 옷의 대머리 할아버지와 하늘색 옷의 회색 머리 할아버지는 내 자리와 마주 보는 방향의 열 줄 너머 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리옹 역을 빠져나간 기차는 삭막한 교외를 가로질러 얼마 안 가 펼쳐지는 전원의 풍경 속을 맹렬히 달렸다.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살에 노곤해져 머리를 기대고 쪽잠에 들 때까지 순례자로 보이는 두 사람과는 등받이 너머로 몇 번이나 눈이 마주쳤다.


 





 쌩떼띠엔느 역은 벌써 네 번째 방문이었다. 리옹에서 르퓌로, 르퓌에서 파리로, 또는 파리에서 르퓌로 가기 위해 거쳐가는 환승지. 뜻하지 않게 세 시간을 기차역에 머물러야 했던 처음 빼고는 늘 10분 안에 환승했어야 해서 쌩떼띠엔느에서의 기억은 대부분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전광판을 확인하고, 환승열차가 서는 승강장으로 뛰어가던 숨 가쁜 순간들이었다.

 몇 번을 뛰어다닌 경험으로 열차에서 내려 로비로 가서 기차표를 펀칭하고 또 다른 승강장으로 가서 환승열차를 타는 데까지 10분이면 충분하다는 여유가 생겼다.

 곧 쌩떼띠엔느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오자마자 배낭을 메고 르퓌행 표를 미리 손에 쥔 채 문 앞으로 가서 열차가 서길 기다렸다. 마침 기차가 서는 A 승강장은 로비와 바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쌩떼띠엔느 역의 펀칭기는 A 승강장에서 로비로 들어가는 문 앞에 단 두 개뿐이었다.

 기차에서 내려 로비를 향해 몇 걸음 가니, 문 앞에 형광 연두색 펀칭기가 얌전히 서 있었다. 아주 사소한 계획의 성공을 눈 앞에 두고서, 히말라야 고지에 다다른 탐험가처럼 주책맞은 뿌듯함이 밀려왔다. 팔을 번쩍 올려 고지에 깃발을 꽂는 마음으로 펀칭기를 향해 표를 내밀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내 배낭을 붙잡아 내 전진을 저지했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파리에서 같은 기차 칸에 앉아 온 빨간 등산복을 입은 대머리 할아버지가 나보다 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서 있었다.

 "너 르퓌로 가는 거 아니니?"

 "네? 맞아요."

 "아이고, 얘, 여기는 르퓌가 아니란다. 우리는 F승강장으로 가서 갈아타야 해. 안 되겠다, 우리랑 같이 가자."

 "어...???"

 고지 탈환을 눈 앞에 두었던 탐험가는 조금 모자란 예비 순례자가 되어서 친절한 두 할아버지에게 이끌려 고지에서 점점 멀어졌다. 한 손에는 꽂지 못한 깃발처럼 펀칭 못 한 르퓌행 열차표를 쥐고서.




 "혼자 왔니?"

 F승강장으로 가는 지하 통로를 함께 걸으며 빨간 옷 할아버지가 물어왔다.

 "네."

 그간의 배낭여행으로 '펀칭 안 한 기차표는 과태료 대상'이라는 강렬한 경고가 시스템에 새겨져 있는 나로서는 이렇게 그냥 기차에 올라도 되는 건가 의아해하며 대답했다.

 "왜?"

 이 분은 왜 '이 길'을 걸으러 왔는지 묻는 걸까, 아니면 왜 '혼자' 왔는지 묻는 걸까? 첫 번째가 그 의도라면 순례길에서 무수히 듣게 될 질문이라 미리 준비한 번듯한 답이 있었다.

 '신과 가까워지고, 용기를 얻고 싶어서.'

 처음에는 진실이라 할 수 없었던 이 대답은 길을 걸을수록 점차 진심이 되어갔지만, 그 순간은 너무 갑작스러워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혼자이고 싶어서요..."

 미리 준비한 대답은 꺼내지 못하고, 작게 우물거리며 말했다.

 "혼자도 좋지. 나는 사업 때문에 말레이시아에 사는데, 이 친구와 산티아고까지 걸으려고 석 달 휴가를 내서 왔단다."

 두 프랑스인 순례자와 서로 사는 곳 등 평범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F승강장에 도착했다. 세 칸짜리 르퓌행 완행열차는 일찌감치 문을 모두 열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열차는 이미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두 할아버지와는 기차에 오르며 자연스레 갈라져 서로 다른 칸에 자리 잡았는데, 나는 열차의 가장 앞쪽 창가에 앉았다. 다른 좌석처럼 의자가 둘씩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대신 벽에서 창가까지 긴 소파가 기역자로 둘러진 자리였다.  소파에 나란히 앉은 다른 두 사람과 어색하게 눈인사를 하는 사이에 열차는 문을 닫고 서서히 르퓌를 향해 출발했다. 오후 네 시의 나른한 햇살이 노곤한 어깨에 내려앉았다.




 "여기 앉았구나. 좋은 자리네."

 빨간 옷 할아버지가 나를 찾아왔다. 세 칸짜리 작은 열차지만 끝에서 끝까지 가로질러 와, 마음을 써주는 게 참 고마웠다.

 "그러고 보니 나 예전에 한국에도 사업차 들른 적이 있었지. '안녕하세요!' 어때, 내 발음이?"

 "아주 잘하시네요."

 "르퓌부터 어디까지 걷니?"

 "이번에는 생장까지 가려고요. 그리고 내년에 다시 와서 생장에서 산티아고까지 이어서 걷고 싶어요."

 "좋지. 한국에서 트레이닝은 충분히 하고 왔겠지?"

 "무슨 트레이닝이요?"

 "운동 말이야. 등산이나 걷기 그런 거."

 애석하지만 최근 반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꼼짝도 안 한, 숨만 쉬는 돌처럼 보낸 시간이었다.

 "... 아니요."

 "전혀?"

 "네. 전혀요......."

 "아이고, 미쳤네. 미쳤어."

 할아버지의 푸른 눈에 걱정스러운 빛이 스쳤다가, 곧 다시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넌 충분히 할 수 있어. 처음 이틀은 오르막이 아주 심할 거야. 그러니 아주 조심해야 해. 그 이후로는 점점 쉬워질 거야. 어제는 눈이 왔다던데 오늘은 날씨까지 맑구나. 정말 운이 좋기도 하지."

 "정말 우리는 운이 좋아요."

 " 우리 길 위에서 자주 보게 될 거야. 힘이 들거나 도움이 필요해지면 언제든 얘기하렴. "

 할아버지는 진심으로 행운을 빌어주고서 다시 열차를 가로질러 돌아갔다.

 순례길에서 걱정과 안부를 서로 나누는 사람을 까미노 프렌드라고 한다던가. 그렇다면 이 할아버지는 나의 첫 까미노 프렌드일 테다. 르퓌행 기차에서 만난 길동무.

 비록 내일 길을 떠나는 두 사람과 르퓌에 하루를 더 머물 예정인 데다 걸음까지 느린 내가 다시 만나기는 힘들겠지만, 나의 첫 길동무들을 위해 잠시나마 기도했다. 메마른 마음에도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수 있게 비를 내려주는 것.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까미노 매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르퓌행 완행열차는 찬찬히 평화로운 오베르뉴 산간을 스치며 나아갔다. 소파에 앉은 다른 두 사람은 오늘 처음 본 사이 같은데 오래된 친구처럼 친근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고, 종종 프랑스어로 나에게도 말을 걸었다. 그럴 때면 그냥 빙긋 웃으며 침묵으로 화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검표원은 내 기차표에 아무 말 없이 철컥, 펀치로 구멍을 내고 지나갔다. 펀칭 안 한 기차표 따위, 까짓 거 아무 문제가 안된다는 의미로 곰인형 모양의 구멍이 뚫렸다. 아무 문제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내 안에 소용돌이가 일어 나를 지탱하던 많은 것들을 휩쓸어 갈 때도 시간은 이렇게 평온하게 흘러갔겠지.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없던 나의 질끈 감은 눈꺼풀 위에도 이렇게 햇빛이 지나갔겠지. 기찻길 옆 나무 사이로 아무 일 없이 흘러가는 강의 수면에 햇빛이 닿아 반짝거렸다. 눈이 부시도록 찬란했다.














 르퓌 역은 그동안 오갔던 그 어느 때보다 가장 붐볐다. 기차에서 내려 머물 곳을 찾아가는 순례자들의 등산복이 작은 역사를 알록달록하게 수놓았고, 내 옆자리에 앉아오던 남자는 마중 나온 연인과 깊은 포옹을 하고 있었다.

 언젠가 더없이 푸르른 나무가 되어 단단히 뿌리내린 나의 터전에서 잠시 벗어나 자아의 완성과 같은 열매를 맺으러 산티아고를 향해 갈 때, 그 시작이길 바랐던 르퓌에 왔다. 비록 여윈 나무에 매달려 있는 가지처럼 위태롭게 서 있지만, 그래도 다시 왔다.

 '오랜만이야. 다시 약속을 지키러 왔어.'

 마음이야 어떻든, 나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끼니를 챙기고 두 발로 나아갈 것이다. 햇빛을 쬐고 때로는 비를 맞으며 몸을 누일 자리를 찾아 짐을 풀고 잠에 들어야 한다. 마음이야 어떻든, 그렇게 살아가고 살아내야 한다.






 





 알록달록한 행렬 가장 끝에서 구시가지로 향했다. 기차역 부근 호텔에 묵을 거라던 빨간 옷 할아버지와 하늘색 옷 할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생쟉 호텔이 있는 광장에 닿자 배낭의 행렬은 각자 머물 곳을 찾아 조금씩 흩어졌다.

 행렬 끝 자주색 점이었던 나는 광장에 서서 찰나의 회상에 젖었다가, 돌길을 따라 구시가지 깊숙한 곳으로 걸어갔다. 오늘부터 해가 지평선을 향해 몸을 누이는 이 시간 즈음에 매일 할 일이 생겼다. 요셉 성인이 만삭의 성모 마리아를 노새에 태워 베들레헴으로 피신했을 때, 굳게 닫아건 여관 문을 두드리며 한 말, '빈 방 있습니까?'

 나 하나 쉬어 갈 자리를 찾는 게 요셉 성인의 간절함에 비할 바는 아니라도, 매일 길을 떠나는 이에게 막막한 우주와도 같은 하루를 닫고 또 여는 안식처를 찾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과가 될 것이다. 기차역에서 몇 걸음 오지 않은 첫날부터 배낭끈이 어깨를 파고드는 것처럼 아파왔다. 어서 숙소를 찾아 배낭을 내리고 뭐부터 빼버릴지 살펴봐야 했다.

  빠듯한 여행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어서, 기차에서 틈틈이 구글로 르퓌의 지트(gîte:민박- 순례길에서는 순례자 숙소를 의미하기도 한다.)를 검색해서 점찍어둔 기부제 지트를 찾아 골목길을 더듬어 나갔다. 하지만 밝지 않은 길눈으로 힘들게 찾아낸 구글 지도의 빨간 점 그 자리는 아무리 담장을 돌고 돌아도 간판 하나 보이지 않고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어깨를 짓누르던 통증은 점점 허리로, 무릎으로 내려왔다.

 어디든 처음으로 보이는 숙소 문을 두드리리. 그곳이 마구간이더라도.

 













 좁은 골목을 따라 작은 아치 아래를 지나자 다닥다닥 줄지어 있던 지붕에 가려져 있던 널따란 하늘이 펼쳐졌다. 그 하늘 아래 막다른 벽처럼 커다란 건물이 고요 속에 서 있었고, 고개를 조금 돌려보니 왼쪽에 높이 바위 너머 솟은 붉은 성모자상이 가까이 보였다. 건물의 하늘색 철문에 가까이 다가가니 주소와 문패가 있었다.

 'Grand Seminaire - Accueil Saint Georges'

 신학교인가? 가톨릭 기관인 걸까... 숙소 같기는 한데... 너무 비싸면 어쩌지...

 무엇도 확신할 수 없어 견고한 문을 두드리기가 망설여졌다. 요셉 성인의 간절함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빈 방 없습니다, 쾅!' 하고 문이 닫히면, 그 소리가 메아리처럼 내내 나를 따라다닐 것만 같았다. 미움과 자책이 뒤섞인 수면 아래서 한없이 차고 작아진 나는, 사소한 거부도 무서운 기세로 덮쳐오는 커다란 파도처럼 두렵기만 했다. 그냥 발길을 돌려 헤맬 필요 없는 생쟉 호텔이나 카푸친 호스텔로 가고 싶었다.

 두 개의 길목이 만나는 작은 광장을 둘러싼 벽과 하늘과 돌길과 정적, 그리고 저 너머 붉은 성모자상까지 내 손끝에 집중하는 듯했다. 그래서 아무도 보는 이 없는데 머뭇거리는 내가 못내 부끄러웠다.

 마음이야 어떻든 이제부터 매일 나의 안식처를 찾는 데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나의 ' 빈 방 있습니까?'에 문이 열리지 않는다면, 발길을 돌려 다른 문을 찾아 두드려야 한다. 그래, 그곳이 마구간이더라도.

 크게 심호흡을 두어 번 하고 문으로 한 발 더 다가섰다. 문을 두드리는 대신 초인종 버튼에 손가락을 댔다. '빈 방 있습니까?'라는 말 대신 딩동, 하는 맑은 벨소리가 나를 둘러싼 적막을 타고 잔잔한 파도처럼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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