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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수운 작가 우듬지 May 22. 2020

영화 <처음 만나는 자유> 리뷰

불안정한 내면세계, 한번씩 겪은 적 있으시죠?

영화 <처음 만나는 자유(Girl, interrupted),1999>


전 사춘기가 20대 초반에 왔던 걸까요.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자아를 어찌하지 못했던 저는, 조심스럽게 고백건대, 수면유도제를 다량 복용하고 응급실에 실려간 적이 있었습니다. 청소년기 때 급격하게 기울어진 가계 상황, 그로 인해 빚어진 부모님의 불화, 이를 지속적으로 문제 삼던 당시의 남자 친구(지금의 남편과는 다른 인물입니다)까지. 20대 초반의 저를 둘러싼 이 모든 상황은, 아직 내면이 다져지지 않은 제게는 너무 큰 혼란이었습니다. 저는 그 상황들로부터 도피하고 싶었고, 제가 아는 유일한 방법은 육신의 스위치를 끄는 것이었나 봅니다.




<처음 만나는 자유>의 주인공 열일곱 살 '수잔나'는, 20대 초반의 저처럼 불분명하고 불안한 현실을 견딜 수 없어 아스피린을 다량 복용합니다. 깨어난 그녀는 자살미수로 판정받고 정신병동에 가게 되죠. 이런 그녀가 한 말 중 가장 공감 가는 대사는 "죽고 싶은 게 아니라, 이 지겨운 상황을 끝내고 싶었어요"였어요. 저 또한 그 말의 뜻을 잘 알고 있었죠. 죽고 싶은 것과 지겨움을 청산하고 싶었던 것은 얼핏 동의어처럼 들리지만, 어떤 이에게는 완전히 다른 말이기도 합니다. 숨을 쉬기 위해, 살기 위해, 나를 죽여야 하는 그런 기분을 느끼는 사람들 에게는요.


정신병동에서 마주한 또래의 소녀들은, 처음에는 수잔나에게 큰 충격을 줍니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내면에 있었던 이유 모를 우울증처럼, 다른 소녀들도 비슷한 상황이라는 것을 깨닫고 수잔나는 병동 생활에 점점 동화되어갑니다. 우정도 쌓아가면서요. 그곳에서 만난 소녀들과의 유대관계 속에서 수잔나는 난생처음으로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을 받습니다. 일종의 자유처럼 느껴집니다. 미래에 대해 골치 아픈 고민을 할 필요도, 목표를 설정할 필요도, 갈피를 잡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회의감도 느낄 필요가 없었죠. 수잔나는 제법 웃는 날이 늘어갑니다. 아픈 소녀들을 되려 사무적으로 대하는 병원의 직원들과 의사가 냉소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하죠.




수잔나는 그 소녀들 중에서도 '리사'라는 친구와 가장 가까워집니다. 안젤리나 졸리가 연기하는 이 리사라는 캐릭터는 매우 거침없고 자유분방합니다. 정신병원의 딱딱한 분위기에 유일하게 도전하고 지시를 거스르는 터프한 소녀죠. 자신에게는 없는 그 대범하고 호기로운 모습에 수잔나는 동경 비슷한 감정을 느낍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잔나와 리사는 이 재미없고 딱딱한 병원을 탈출하기로 합니다. 아무런 정신병도 죄도 없는 자신들을 가두고 가르치는 사람들로부터 해방되고 싶었던 거죠.


처음엔 희망에 가득 찹니다. 그런데 막상 탈출을 하니 뭔가가 삐걱댑니다. 돈도 한 푼 없는 데다가, 잠 잘 곳도 없어 찾아간 정신병원 동기 '데이지'의 집에서, 왠지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데이지를 만나게 되죠. 그녀는 분명 모두의 질투를 받으며 먼저 퇴소했는데 왜 행복해 보이지가 않는 걸까요.


게다가 공격적인 리사는 괜한 시기로 데이지에게 악담을 쏟아붓고, 이를 견디지 못한 데이지는 그날 밤 욕실에 목을 매고 죽게 됩니다. 하지만 리사는 죽은 데이지를 보고도 반성을 하기는커녕 그녀의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달아날 계획을 세우죠.


수잔나는 무엇인가 잘못됐음을 느낍니다. 그토록 동경하던 리사가, 자유분방하고 멋지기는커녕 실은 커다란 문제아였음을, 탈출만 하면 행복하리라 믿었던 것이 그저 망상에 불과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왜 정신병원에 보내졌는지를 말이죠. 내면이 불안정한 자신에게는 아직, 바깥세상을 정면으로 마주할 온전한 힘이 없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된 겁니다.



그렇게 그녀는, 자발적으로 정신병원으로 돌아갑니다. 자신에게는 치료가 필요함을 받아들이고 그토록 거부하고 불신하던 정신과 치료를 성실히 받기 시작합니다. 자신을 유일하게 인간적으로 대해주었던 간호사에게 쌀쌀맞게 굴었던 지난날의 잘못도 사과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내면에서 뒤엉킨 수많은 혼란들을 자신의 노트에 적기 시작합니다. 생각의 옮김과, 정신과 치료는, 그렇게 서서히 그녀의 시끄러웠던 내면을 정리하고 변화시킵니다. 


이윽고 그녀는 완전히 깨우치게 되죠. 정신병동에서는 미래를 꿈꾸지 않아도, 열심히 살지 않아도, 왠지 모를 평화와 자유가 주어졌지만 바깥세상은 그렇지 않다는 걸요. 하지만 건강한 바깥사람들은 그 순탄치 않은 바깥세상에서 모두들 사람 구실을 하며 살아가고 있고, 자신도 사실은 그렇게 되고 싶다는 걸요. 모든 사회적 무게와 슬픔과 책임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마음은 그저 어린아이 같은 생각일 뿐이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그녀는 성실한 치료와 내면의 성장을 거쳐 병동 바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무렵 바깥을 떠돌던 리사는 다시 병원으로 돌아오게 되죠. 더 이상 수잔나에게 리사는 멋지고 당찬 소녀가 아닙니다. 동공에 허무함만이 비치는, 그저 어른이 되지 못한 소녀죠.


영화는, 수잔나가 병동을 퇴소해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는 장면으로 끝이 납니다. 그 후의 이야기는, 철저히 관객의 몫으로 남겨집니다. 






저는 수잔나가 사회에 잘 적응해 어엿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갔을 거라고 믿어요. 왜냐면 저도 그랬으니까요. 저도 분명 한때는, 시련으로만 느껴지는 환경들을 져버리려고 미련한 선택을 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로부터 십 년을 더 살아보니, 그때 그 선택이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를 알겠더라고요. 세상은 원래가 시련으로 가득합니다. 원래가 공평하지 않고요. 모두가 상처 하나 없이 마냥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들 수면제를 먹거나 세상을 포기하지는 않죠.


영화는 그저 정신병동을 거쳐 사회로 나가는 한 소녀의 단순한 성장기를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마음에 우울함이 스쳐와 이를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되어본 적 있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일 겁니다. 하지만 그런 우울감은 언제든 치료가 가능하며, 당장 육신을 꺼버려야 끝나는 극단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살면서 겪는 그런 마음의 병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극복해나가야 할지 이 영화는 많이 에둘러, 우리에게 알려주는 듯합니다.


누군가는 병동에 머무르고, 누군가는 병동 밖으로 나가겠죠. 내 안의 문제를 내가 외면하면 우리는 영원히 정신병동에 발이 묶여 미쳐가는 '죽은 사람'이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정면으로 내 상처와 문제들을 바라보고 맞서나간다면, 마음의 병원에서 진정으로 퇴소할 수 있을 거예요. 


절대로 평탄하지만은 않을 긴 인생에서 우리는 과연 우리의 내면의 병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나요. 영화가 묵직하게 말하고 있듯, 저는 저와 여러분들 모두가 '수잔나'이기를 바랍니다. 아름답고 행복하지만은 않을 삶을, 수잔나와 같은 태도로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난 내 삶의 1년을 낭비했어. 아마도 바깥세상에는 거짓말쟁이 투성이겠지. 세상 전부가 멍청하고 무지할지도 몰라. 하지만 난 그래도 세상 속에서 살겠어. 그 엿같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겠다구." _ 수잔나




ABOUT MOVIE

1. 이 영화는 '수잔나 케이슨'이라는 실제 동명인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라네요. 

2. 1999년에 개봉한 연식이 조금 된 이 영화에서는, 풋풋한 위노나 라이더와 안젤리나 졸리를 볼 수 있습니다. 

3. 위노나 라이더가 이 영화에 큰 애정을 느껴 제작 단계부터 많은 기여를 했다는 후문이 전해지구요.

4. 32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브리트니 머피의 예쁜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5. 안젤리나 졸리는 이 역할로 골든글러브와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거머쥐었죠. (캐릭터 정말 찰떡!)







해당 포스트는 인스타그램 매거진 <주간우두미>의 05호 포스트의 일부입니다. <주간우두미>는 인스타그램 @woodumi 계정 또는 해시태그 #주간우두미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2020 매우 주관적인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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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 @woodu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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