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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바통터치

내 분노를 당신에게 전달해서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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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건강검진 확인서를 내라기에, 얼마 전 정밀 건강검진을 받은 검진센터에 전화를 해 확인증을 팩스로 요청했다. 이런 일이 있으면 나는 일부러 오전 일찍 전화를 해, 그들이 충분히 처리할 시간을 확보하게 해 준다. 착한 사람 컴플렉스에 빠진 내 나름의 배려다. 오전에 전화했으니 당연히 오후 두 세시 언저리쯤까지는 팩스가 들어와 있겠거니 생각하며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는데. 다섯 시 즈음 매니저에게서 카톡이 왔다.


「아직 팩스 안 들어왔어요 ㅠㅠ」


뭐라고? 여섯 시면 매니저는 퇴근이고 당연히 검진센터 직원도 퇴근이 코 앞일 텐데, 왜 이제까지 팩스가 안 들어왔지? 나는 당장 전화를 걸었다. 내가 팩스를 요청한 직원과는 다른 목소리의 직원이 전화를 받았다. 한껏 성 난 목소리로 자초지종을 물으니 황당하게도, 아까 내 전화를 받은 직원이 일처리를 안 하고 퇴근을 했다는 게 아닌가.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나를 더 화나게 하는 것은 그들의 태평한 태도였다.


"내일 오전에 넣어드려도 될까요?"


아니 아니. 일부러 오전 일찍 전화해서 하루 반나절이라는 시간을 줬는데, 죄송합니다 지금 당장 보내드릴게요, 가 아니라 내일 보내주겠다고? 나는 제대로 열이 받아 소리를 빼애액 내질렀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확인증을 발급하는 시간이 필요하며, 일단 담당 직원은 퇴근을 했더라는 이야기뿐이다. 이쯤 되면 어차피 오늘 받기는 글렀다는 사실에, 필요 이상으로 솟구쳤던 화는 빠르게 수그러든다. 나는 김 빠진 목소리로 "네, 내일 꼭 넣어주세요"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난 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일이 남겨졌다. 그것은 구차한 변명을 늘어놔야 하는 상황. 분명히 오전에 검진센터에서 팩스가 갈 거라고 했던 나의 말이 매니저에게는 새빨간 거짓이 되고 말았다. 아침부터 부지런하게 팩스 요청을 했으나 담당 직원이 일처리도 안 하고 퇴근하는 바람에 그런 거라고 남 탓을 하고 변명을 하면 얼마나 구차해 보일까. 나는 그저 매니저에게 죄송하다, 내일 다시 팩스를 넣겠다고 하고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아, 너무너무 싫다. 본의 아니게 뺀질뺀질한 직원이 되고 만다는 것은.


퇴근을 하는 길, 문득 너무 열이 받아 소리를 질러댔던 아까의 상황이 떠올랐다. 매니저에게 구차해지게 된다는 사실 탓에 좀 과하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나도 안다. 내가 죄 없는 상대에게 화를 냈다는 것을. 내 전화를 받은 직원은, 자신의 일도 하지 않고 집으로 간 다른 직원 탓에 영문도 모르고 분노의 전화를 받은 것밖엔 죄가 없었다. 그녀는 또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아무 영문도 모르고 고객의 화를 받아야 하는 건 백화점 서비스 노동자인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는데. 같은 처지에 내가 너무했다 싶었다. 아마도 그녀는 내 전화에 너무 기분이 더러워진 나머지 퇴근길에 맥주를 한 잔 걸쳤을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일진도, 나의 일진도 사나웠던 하루였던 걸까.



감정의 바통터치는 참 신기하다. 그리고 야속하다. 이렇게 때때로 이상한 방향으로 감정이 흘러 아무나의 기분을 망쳐버리고 만다.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에게 내 분노를 표출하게 되고, 그 분노를 이어받은 사람은 또 다른 사람에게 분노를 전달하고. 살면서 이런 불똥은 맞지 않길 바라지만, 이따금씩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이런 불똥이 휙 날아오곤 한다. 나도 백화점에서 고객을 상대하며 늘상 겪는 일이지만 아직도 적응이 쉽지 않은 일이다. 고객들이 어딘가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우리에게 풀고 가고, 우리는 그들로 인해 받은 스트레스를 가족에게 풀고, 어떨 땐 그 스트레스를 어쩌지 못해 스스로를 자학하기도 하는 일.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시작점도, 종착점도 모르는 이 감정의 바통터치란.


다음날. 출근도 하기 전에 회사로 팩스가 도착했다. 분명 나의 전화에 놀랐을 직원이 밤새 잊지 않고 생각한 덕분에, 출근을 하자마자 처리를 한 것이리라. 뒷북이지만, 너무 미안했다. 나로 인해 번진 분노의 불씨가 더 엄한 곳으로 퍼져나가지 않기를, 소심하게 바라보는 수밖에.






2020 일상의짧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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