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꿀 수 있는 거잖아요 그쵸?
90년대. 옛것을 그리워하는 습성 탓일지, 우리는 문화 전성기 같았던 90년대의 풍경들을 자주 회상하곤 한다. 서태지와 듀스가 있었고, 이상하게 지금 봐도 촌스럽지 않은 패션들이 있었고, 무엇보다 IMF가 터지기 직전까지 모든 것이 융성하고 호황이던 그 시절 그 문화. 이 90년대를 대표하는 키워드에 늘 빠지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오렌지족이다.
오렌지족이라 함은, 그 당시 부유층의 자제들로 수입 외제차를 몰고 다니며 용돈을 300만 원씩(그 당시 물가를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용돈) 받던 젊은이들을 말한다. 그들은 별다른 생산활동은 하지 않고 부모의 용돈을 쓰고 다니는 이른바 90년대 금수저들이었다. 오후 한시쯤 늘그막이 일어나 사우나를 갔다가, 두세 시쯤부터 강남 일대를 돌아다니며 돈을 쓰고 다녔다는 돈 많은 젊은이들. 지금에야 그러거나 말거나 자유의 시대지만 그 당시엔 이 오렌지족이 불건전한 사회현상으로 여겨지며 뉴스 대문에 자주 등장할 정도였으니, 그들을 바라보는 어른들이 어찌나 눈살을 찌푸렸을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재밌는 건, 그런 오렌지족을 표방한 '낑깡족'도 존재했더라는 사실이다. 푸핫, 낑깡이라니. 표현이 귀여워서 픽픽 웃음이 난다.
맞다 그 낑깡. (우리나라 말로는 '금귤') 생긴 건 오렌지를 닮긴 했는데 탁구공만 한 크기로 껍질채 씹어먹는 그 쬐그만한 과일. 과즙이 줄줄 흐르고 맛도 있는 오렌지에 비하자면 낑깡은 네 맛도 내 맛도 아니다. 이 낑깡족은 또 뭐냐 하면. 돈 많은 부유층 자제들인 오렌지족을 표방한, '오렌지족만큼 돈은 없지만 그들을 쫓아 생활하다가 가랑이가 찢어지던 족'들을 말한단다. 어감은 귀엽지만 사실 부유한 오렌지족을 몹시도 부러워하다 그만 가랑이가 찢어질 정도니 실상은 매우 슬픈 족속들이라 해야 할까.
아무튼 하나의 좋지 않은 사회적 현상으로 치부되었던 90년대의 그 오렌지족-낑깡족의 문화는, 미안하게도 세월이 지나 2020년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자본가들과, 그런 자본가들을 좇아 성공신화를 꿈꾸는 자들. 어쩌면 오렌지와 낑깡은 단지 90년대 만의 특수한 사회현상이 아니었던 걸지도 모른다.
2020년을 살고 있는 나는, 역시 당연히도 낑깡이다. 오렌지를 닮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건만 오렌지를 꿈꾸고 오렌지가 되고 말 거라고 생각하는 아주 작고 귀여운 낑깡. 단지 돈 많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은 아니나, 내가 꿈꾸는 삶에도 어느 정도의 부는 포함이 되니 나는 분명 낑깡이 맞을 거다. 갈수록 빈부격차가 양극화되는 이 살기 힘든 세상에, 어느 정도 자본을 갖추고 태어나야 출발선도 빠르고 남들보다 하고픈 일도 빨리 이루는 법일 지니... 낑깡으로 태어난 주제에 감히 몸집이 두 배 이상인 오렌지가 되고 싶어 한다는 건 어쩌면 헛된 꿈일까?
하지만 오렌지라고 해서 결이 다 같지는 않을 터. 내가 꿈꾸는 오렌지의 삶이란 어떤 것이냐. 멋진 작품들을 줄줄이 쏟아낸 유명 작가, 명품백을 모으는데 돈을 쓰진 않아도 나를 위한 것들에 아낌없이 돈을 쓸 수 있는 여성, 내 가족들을 위한 보금자리도 턱턱 마련하는 딸이자 며느리, 일 년에 두어 번씩 해외여행도 다니고 뮤지컬도 첫째줄 VIP석으로다가 맘껏 보러 다니는 문화인의 삶이랄까. "그니까 그게 오렌지잖아. 넌 그냥 낑깡이라고"라며 누군가는 코웃음을 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기죽지 않고 오렌지를 꿈꾼다, 아니 꿈꾸고 싶다.
능력이 안되는데 누군가의 번드르르한 생활양상만 쫓아 허덕이는 낑깡이 되겠다는 건 아니니, 그 옛날 뉴스에 비치던 것처럼 혀를 끌끌 차며 나를 보지는 않았으면 싶다. 단지 나는, 내가 원하는 일을 업으로 삼으며 부족하지 않은 돈을 벌고 내 가족을 어려움 없이 돌 볼 수 있는 수준의 사람이 되는, 그래도 비교적 건강한 오렌지를 표방하는 것이니까. 내 가족에게 금전적 피해를 주지는 않는 선에서 오렌지든 자몽이든 최대한 꿈꿔 볼 수는 있는 권리쯤은 설마 내게 있겠지. 그렇게 해서 꿈꾸는 삶이 되면 좋은 거고, 아님 뭐 어쩔 수 없는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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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나 지금이나, 날 때부터 오렌지였던 축복받은 사람들은 존재한다. 그리고 무수한 낑깡도 존재한다. 어차피 부의 불평등이 영원한 사회적 현상이라면, 그래서 누군가는 이미 정상에 올라앉아 거드름을 피울 때 누군가는 허리춤에 타이어를 매달고 뛰어야 하는 불공평한 세상이라면. 낑깡으로 태어난 자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딱 두 가지가 아닐까. 낑깡이 숙명이라고 생각하며 낑깡으로 살거나, 그래도 열심히 살다 보면 오렌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죽어라 뛰어보거나.
나는 언젠가 오렌지가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뛰어보기로 했을 뿐이다. 일하고, 글 쓰고, 잠을 줄이고, 시간을 쪼개 쓰고... 그렇게 살다 보니, 느낌적인 느낌이지만 신기하게도 껍질이 전보다는 좀 더 두꺼워진 것 같다. 덩치도 예전보단 조금 더 커진 것 같고, 왠지 오렌지 냄새도 나는 것만 같다. 꿈을 위해, 모태 낑깡인 근본을 내 한계라고 여기지 않고 고군분투해왔으니, 아마도 오렌지까진 아니어도 하우스 밀감 정도는 된 게 아닐까. 열심히 꿈을 꾸고 노력하다 보면 어쩐지 점점 오렌지를 닮아가는 모양이다.
"자신이 될 수 있는 존재가 되길 희망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다."_ 신시아 오지크(Cynthia Oz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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