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둬야 할 이유가 차곡차곡 늘어난다면
가을 초쯤부터, 나는 백화점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거의 턱끝까지 차올라 있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여러 진상 고객들로 인한 스트레스로 너무 예민해져 있었고, 그로 인해 살도 급격히 쪄버린 데다(인생 최고 몸무게를 찍었다), 가장 오래 근무한 축에 속하는데도 아직까지 실수를 한다는 것에 피해의식이 심했다. 그것들이 크레이프 케이크처럼 켜켜이 겹쳐져 하루하루를 참 힘들게 했다. 마음의 여유가 하나도 없어 매일같이 화가 났다. 솔직히 죽겠는데 꾹꾹 버티는 중이었다. 관두면 안 되는 현실적인 이유를 억지로 떠올려가면서.
그런데 꼭 이럴 땐 무슨 법칙처럼, 기폭제가 되는 사건 하나가 등장한다.
휴무였던 날 집에서 남편과 쉬고 있을 때였다. 남편과 근교로 나들이를 가기로 하여 몹시 설레어있었는데, 백화점 업무 단톡방이 드르륵 울렸다. 여느 때처럼 스케줄 공지인가 싶어 열어보았다. 그런데 느낌이 싸했다. 확인해보니 데스크 실수에 대한 공지였다. 유한 성격인 매니저는, 웬만한 큰 실수가 아니고서야 굳이 모든 사람들이 다 보는 단톡방에다가 실수 지적을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번의 실수는 조금 큰 건이었다. 그리고, 다름 아닌 내가 접수한 건이었다.
놀라서 접수내역을 확인해보니, 원거리 시스템으로 접수되어야 하는 주소를 근거리 접수로 받아놓은 상태였다. 우선, 두 접수의 시스템은 완전히 다르다. 근거리는 우리 백화점 측 배송기사님들이 바로 배송을 나갈 수 있지만, 원거리는 서울로 집하되었다가 그곳에서 다시 갈라지는 배송 시스템이다. 배송시간도 하루 이틀 더 걸린다. 대관절 이런 실수는 왜 한 걸까. 그것도 내가, 여기서 두 번째 고인물인 내가 왜.
기억을 더듬어보니 놀랍게도 다 생각이 난다. 와인 매장 직원이 와서 한 접수였고, 신주소를 적어 들고 왔었다. 우리는 구주소 기반 접수니까, 직원이 신주소로 들고 오면 인터넷에 검색해 주소를 전환해서 시스템에 넣어야 한다. 그런데 운이 좋으면 이미 우리 쪽에 등록되어있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아싸, 운이 좋게도 전화번호를 치니 근거리 시스템에 등록이 되어있다. 영통구 하동. 음, 근거리 맞네. 그래서 그냥 직원이 들고 온 신주소와, 우리 쪽에 등록되어있는 구조소의 일치 여부를 확인하지 않고 접수를 받았다. 아파트랑 동호수가 일치했으니 맞겠거니 하면서.
그런데 아니었던 거다. 직원이 들고 온 주소는 '하동'도 아니었고, 하필 영통 쪽에서도 원거리로 분류되는 지역이었다. 그러니까 애초에 누가 등록해놨는지는 몰라도 완전히 잘못 등록된 주소였는데, 재확인을 하지 않은 게 이 사달이었다. 다음날 우리 기사님이 아침에 배송을 가려고 보니 주소가 이상해서 이를 사무실에 이야기했고, 사무실이 이를 조회해보니 거기는 우리 기사님이 나갈 수 없는 원거리 지역이었고. 그리되면 오늘 물건을 받는 줄로 아는 고객에게 전화해, 하루 이틀 더 걸릴 거라고 고지를 해줘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운이 나쁘게도 고객이 이 일을 걸고넘어진다면 정말 더 큰 화를 부를 수도 있는 일이었다. (다행히 고객은 이해해주었다고 한다.)
■ 우리 백화점 근/원거리 기준 ■
근거리 : 분당, 용인 수지, 수원 영통, 광주 오포
원거리 : 근거리를 제외한 서울, 경기도 대부분의 수도권 지역
아, 이 잘못의 시작은 어디서부터 일까. 애초에 그렇게 시스템에 말도 안 되게 등록해놓은 빌어먹을 인간은 누구이며, 왜 또 하필 원거리 지역을 근거리에 집어넣어놓은 것이며, 왜 또 그 거지 같은 주소는 하고많은 직원들 중 나에게 찾아왔을까. 어쨌든 명명백백히 '접수자:우듬지'라고 적혀있으니 최종적으로 재확인하지 않은 나의 잘못이다. 구구절절 억울함을 호소하면 구차해지는 것은 뻔하기에, 그냥 아주 짧고 굵게 잘못을 빌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노라고.
그러고 나서 별 말없이 마무리되었지만, 사무실과 기사님 둘 다를 당황케 했을 생각에 내 마음은 별 게 아니지 않았다.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사무쳐 온종일 그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점점, 실수를 할 때마다 이 무게가 감당키 어려워지고 있었다.
관두라는 신의 계시일까, 최근에 저지른 큰 건의 실수가 하나 더 있었다.
우리 데스크는 식품관에서 장을 본 고객들의 짐을 접수해서 집까지 배송해주는 서비스를 하는 곳인데, 우리 업무 중 가장 기민함을 요하는 사항이 '물 접수'다. 삼다수, 백산수, 평창수 같은 먹는 물. 물은 고객이 직접 데스크까지 들고 오지 않고 영수증만 끊어오면 접수를 해줄 수 있었기에, 고객들에게는 편한 일이었지만, 우리에게는 실수로 가장 잘 직결되는 부분이었다. 고객이 가지고 온 물건들은 열심히 접수해놓고, 영수증 상에만 쓰여있는 물은 미쳐 보지 못해 접수를 누락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누구나 물을 빠뜨리는 실수를 한다. 그러면 고객이 사무실로 전화를 하고, 그럼 다시 다음 차로 배송이 나가는 식이었다. 데스크에서는 매우 흔한 실수여서 이 일이 평소 중차대한 상황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문제는 최근 내가 누락한 물 접수 건의 상황은 또 또 특수했다는 것.
고객이 물을 못 받았다며 사무실로 전화를 건 시간은 저녁 7시 이후였다. 마지막 배송 차량이 6시에 배송을 나가고 나면 기사님들은 다시 사무실로 돌아오지 않고 퇴근하신다. 한마디로 7시에 전화를 걸어오면 배송을 나갈 기사님이 없다는 뜻이다. 물론 늦은 시간에 물 누락을 알려오는 고객들이 많다. 고객들은 이런 상황을 모르기도 하고, 잘못한 건 우리니까. 그러면 우리는 보통 다음날 첫차로 다시 배송해준다. 당장 먹어야 하는 식재료처럼 급한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의 고객들은 익일 첫차 배송에도 큰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접수한 그 고객은, "다음날 첫 차로 배송해드려도 될까요?"라고 하는 우리 측의 질문에 "아뇨, 지금 먹을 물이 하나도 없어요. 오늘 꼭 갖다 주세요"라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도 고객은 아무 잘못이 없다. 하필 그 전화가 걸려온 시간대에는 배송기사님이 하나도 없다는 그 난감한 상황이 잘못일 뿐.
나는 이 영문을 모른 채 퇴근해 집에서 저녁을 짓고 있었다. 전화를 받은 사무실 측은 결국 직접 택시를 타고, 무거운 물 두 묶음을 낑낑 들고서 고객의 집에 다녀왔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이 사실을, 태평하게 다음날이 되어서야 알았다. 나 때문에 피해를 본 직원에게 미안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그 하루가 어찌나 무거웠는지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내 사주가 온통 흙이고, 물이 부족하다더니. 그래서 나는 이렇게 물 실수도 크게 나는 걸까. 정말 어찌나 별별 생각이 다 드는 하루였던지...
그 두 번의 연이은 실수는 타격이 컸다. 일터에서의 나의 입지 자체를 되돌아보게 하는 사건들이었으니까.
어쩌면 나는 민폐만 일으키는 쓸모없는 존재인지도 몰랐다. 다들 같은 생각인데, 눈치 없이 나만 버티고 서있는 건지도 모른다. 자연스레 이제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폐스런 존재가 되는 것도, 그런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앞으로 더 심혈을 기울여 지내야 한다는 것도, 모두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관둘 때가 되었나 보다.. 관둘 때가 되었나 보다.. 그렇게 내 마음속에 퇴사 의지의 씨앗이 자라났다. 물론 늘 관두고 싶었지만 이번엔 좀 진지하게 말이다.
2020 일상의짧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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