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에서의 18개월. 나의 시간을 돌아보며 적는다.
공식적인 퇴사를 6개월 앞두고 나는 마음속에서 백화점과는 영원히 작별했다.
"6개월? 생각보다 너무 많이 남은 거 아냐?"라고 누군가 묻는다. 하지만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작별하기로 마음먹은 날부터, 곁에 조금 더 있어달라는 애인에게 의무감 이외에 아무런 애정도 남아있지 않은 그런 느낌. 지금의 내가 백화점에게, 그러하다. 6개월을 더 만난 대도, 1년을 더 함께 있기로 한대도, 차게 식은 마음은 돌아올 기미가 없으니, 나는 이미 이곳을 떠난 것이나 매한가지겠지.
찬란히 빛나던 물건들. 모든 게 새롭고 신기하던 시간들. 너무 가깝지 않아 즐거움만을 주었던 한 때의 관계들. 아쉽지만 빛바랜 그들과 이제는 안녕... 안녕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고, 직장도 애인처럼 만남과 끝이 존재하는 것이려니. 이제 나는 그동안의 시간들을 되돌아보며 내가 잃은 것은 무엇이고 얻은 것은 무엇인지 적어보려 한다.
1. 백화점에서 일하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 당연히 직원 혜택! 백화점에서 일하면 서로 얼굴을 알게 되는 직원들이 생겨나서, 서로서로 조금씩 할인을 해주거나 물건을 몇 개 더 챙겨주는 혜택이 많았다. 아예 공식적으로 직원가가 있기도 하고, 직판(직원 판매)이라고 해서 직원들이 다니는 통로에서만 대폭 할인해서 판매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저런 혜택을 받은 걸로 따지면 아마 못해도 백만 원은 아끼지 않았을까. 뭐, 할인을 빌미로 불필요한 것까지 더 사들인 경우도 있었겠지만.
-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얻는 소재로 글을 쓰고 있다 보니, 일반적으로 겪기 힘든 여러 에피소드들을 경험하면서 글의 소재를 많이 얻을 수 있어서 좋았다. 백화점을 다니는 동안 책 한 권 분량의 글을 써냈으니 이는 아마 이 곳을 다니며 얻은 최대 수혜가 아닐까.
2. 백화점에서 일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 첫째도 둘째도 고객 상대. 서비스직을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백화점마다 그리고 매장마다 상이하겠지만, 나의 경우엔 좋은 고객이 30이라면 힘든 고객이 70이었다. 그만큼 매일매일 무례한 고객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아마 내 평생의 모욕과 수치는 이 18개월간 다 경험한 것 같을 정도로. 낮아진 자존감, 예민해진 성격, 무엇보다 사람을 싫어하게 된 대인기피 증상이 여기서 얻은 최대 피해다.
3. 백화점을 다니면서 느낀 우리나라의 서비스직 문화는 어떤가?
- 나는 백화점을 이용하는 우리나라의 소비자들의 질이 정말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정말 깜짝 놀랐다. 무조건적으로 직원을 '하인' 취급하는 사람들이 정말 상상 이상으로 많았으니까. 되려 내가 그동안 얼마나 친절한 고객이었는지를 깨달았달까. 나는 손님이 왕이 되는 우리나라 서비스 문화가 참 미개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의 전반적인 자존감이 그만큼 낮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직원이 자신과 동등한 인격체라는 걸 인지하고 존중할 줄 알아야만 서비스 문화가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 안타깝지만 솔직히 말하면, 대접받고 으스대기 좋아하는 우리나라 백화점 문화로 보았을 때, 우리나라는 아직 먼 것 같다.
4. 나는 좋은 직원이었나?
- 음, 나를 존중하는 고객에게만 좋은 직원이었다. 나를 무시하고 하대하는 고객에게는 아주 상투적으로만 대했고, 나를 존중해주는 고마운 분들에게는 자연스레 친절 모드로 서비스했다. 모든 이에게 친절한 직원이 될 수 없는 성격이었기에, 이곳을 관두는 것이기도 하고.
5. 기억에 남는 좋은 고객도 있나?
- 물론 있다. 오실 때마다 기분 좋게 "안녕하세요"하며 시작하시는 분들이 종종 계셨고 그런 분들은 절대 얼굴을 까먹을 수 없다. 피바람이 낭자하는 곳에 보드라운 꽃 같은 분들이니까. 어떤 분들은 자신이 너무 많은 걸 부탁했다고 생각하시고 미안하다며 간식 같은 걸 사다주시기도 한다. 사람에 대한 애정과 배려심이 있는 분들은 고객이 아니라 정말 '사람'으로서 애정을 느껴 잘해드렸다. 언제나 그분들의 안녕을 바란다.
6. 백화점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는?
- 백화점이 무조건 비싸다고 생각하는 거! 백화점도 여러 할인 행사가 있고 세일 기간도 있어서, 다른 곳과 비교해 무조건 비싸기만 하다는 건 편견이더라. 그리고 백화점 내 적립 포인트나 혜택 같은 것들도 꽤 쏠쏠하다. 나는 백화점이 비싸다는 오해가 일하면서 깨졌다. 아마 이 일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백화점은 비싸다고 착각하고 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백화점 어플을 이용하면서 세일 기간이나 할인 혜택 같은 걸 챙겨본다면, 생각보다 합리적인 소비가 가능하다고 말하고 싶다.
7. 백화점에서 이것 만은 하지 말았으면 하는 점
- 어딜 가나 마찬가지겠지만 소위 '진상짓'이라고 하는, 무례한 언행. 본인은 분노를 표출해 개운할지 모르겠지만, 백화점 내부에 어떻게든 기록이 남는다. 기록을 안 하더라도 직원들끼리 "이 사람 무서운 사람이야"하고 다 공유가 되기 때문에, 본인이 부끄러운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다면 부끄러운 짓은 안 하는 게 좋다. 콜센터 건, 백화점이건, 마트 건, 동네 시장이건, 진상 짓은 모두 기록되거나 최소 구전된다. 구전도 생각보다 무섭다. 나는 내가 일하기 전부터 유명한 진상 고객들을 익히 들어 미리 외우고 있을 정도였으니.
- 그리고 규정 무시하지 말기. 세상 모든 업장에는 규정이란 게 있다. 되는 것과 안 되는 것, 그중에서도 대통령이 와도 안 되는 것도 있다. 직원이 규정이 이러이러해서 안된다고 하면 제발 그 이상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이미 대대로 내려온 규정을 이해하지 못해 소란을 피우면, 다른 정직하고 선한 고객이 불이익을 본다. 다들 건강한 소비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8. 백화점 이후의 계획은?
- 죽으나 사나 글을 쓸 것이다. 언제나 그래 왔듯이. 다른 직장에 가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다시는 서비스직으로는 가지 않을 생각이다.
9. 백화점에게 바라는 점은?
- 시간이 걸릴 일이겠지만, 무조건적으로 고객에게 굽신거리지 않는 것. "친절한 서비스"와 "무조건적인 저자세"의 차이를 구분했으면 좋겠다. 무례한 고객을 통제하지 못하고 마냥 엎드리게 되면, 전반적인 서비스 자체의 질이 개선될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못 이겨 떠나지만 남은 직원들, 앞으로 일할 직원들의 처우가 그들의 무거운 숙제로 남길 바란다. 직원은 정말 중요한 내부고객이니까.
10. 마지막 하고 싶은 말!
우듬지. 2019년-2020년, 분당의 모 백화점에서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상처 받고, 열심히 이를 소재로 글 쓰다. 이만하면 잘 싸웠다! 후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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