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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수운 작가 우듬지 Aug 07. 2020

달라도 잘만 삽니다

삐꺽댈 줄 알았는데 의외의 케미 생성!


이틀 전 남편과 함께 친한 친구를 만났는데 친구가 문득 내게 물었다.

"훈이(내 남편)는 남편으로서 몇 점이야?"

기습적인 질문이었지만 나는 별 고민 없이 답을 했다.

"85점!"

학창 시절 80점만 넘으면 '잘한다'고 여겼던 나로서는 후한 점수다.

"오, 점수 많이 주네?"

친구가 느끼기에도 후한 점수였나 보다. 사실 15점이나 감점할 이유가 딱히 없었는데도 무의식적으로 15점을 깎은 데에는, 남편과 내 취향이 정 반대여서 그랬던 것 같다. 따지고 보면 그게 우리 부부생활에 큰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었는데.


내 남편은 나와는 다르게 수리적 공학적 두뇌가 발달한 사람으로, 공대를 나와 화장품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그야말로 '이과적 두뇌'의 전형이다. 하지만 그 반대로 말하자면, 추상적이거나 문학적인 것들을 이해하는 데는 젬병인 사람. 영화를 볼 때도 나는 미장센 중심의 느릿한 서사, 인물의 감정표현에 공감하는 반면 남편은 (대개의 남자가 그렇겠지만) 빠른 화면 전환과 뚜렷한 기승전결의 이야기에 열광하는 스타일이다. 어떻게 이렇게 서로 다른 색의 남녀가 부부가 되었는지는 묻지 마시라. 나도 여태껏 궁금한 부분이다.


하지만 살면서 깨닫게 된 건데 서로의 다름이 꽤 유용할 때가 많더라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싶겠지만 정말이다. 서로가 '같아서' 좋은 면이 있는 것만큼이나 서로 '달라서' 쿵짝이 맞을 때가 의외로 많다.


이를테면 우리 부부는 정확히 가사노동에 있어 역할 구분이 되어있다. 남편이 맡은 것은 화장실 청소와 분리수거, 그리고 빨래 돌리기와 건조. 내가 좋아하는 것은 전적으로 주방과 관련된 일들(요리, 냉장고 정리, 설거지, 음식물쓰레기 처리)과 큼직한 틀에서의 집안 정리다. 그는 연애 때부터 주방의 기름때는 안 닦아도 화장실 청소에는 열중했으며, 나는 반대로 변기는 무서워해도 음식물쓰레기는 맨손으로도 척척 잘만 만졌더랬다. 그러다 보니 누가 먼저 이렇게 하자는 제안 없이, 서로가 꽂히는 일에 열중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역할분담이 되었다. 서로가 맡은 영역에 있어 지금까지 아무런 불만이 없으니, 이는 묘하지만 꽤 괜찮은 가사분담일까.


달라서 좋은 면은 또 있다. '미래를 위한 노오력' 부문에서도 서로가 차지하는 포지션이 다르다는 것. 이를테면 우리 부부는 언젠가 전세 라이프에서 벗어나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해서 풍족하게 사는 것을 지향점으로 삼고 있는데, 거기서도 맡고 있는 역할이 다르단 것이다. 미래를 향한 나의 포부는 대충 이러하다. "나는 책 몇 권을 내서 작가로서 꼭 성공할 거야, 그래서 전업작가로만 살면서 내 수입만으로도 우리가 먹고사는 게 내 꿈이야." 물론 아직은 허황된 꿈이지만 그 언젠가 그러기 위해서 나는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며 직장생활을 병행하고 있다.

내가 이렇다면 남편의 포부는 이런 식이다. "주식이랑 부동산 공부할 거야. 빨리 집 걱정에서 벗어나고 싶어. 올 해는 여기에 청약 넣을 거고... 종잣돈이 생기면 이런 주식을 살 거고..." 그는 그 나름대로 부동산 정책과 주식을 공부하며 내 집 마련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나는 셈에 취약하기 때문에 남편의 이런 경제공부가 무지 반가운 편.


성공한 전업작가가 되어 남편과 여유롭게 사는 꿈을 꾸는 여자와, 부동산과 주식 공부를 해서 집안 살림을 증식해 나가려는 남자. 누구의 포부가 먼저 현실로 이루어질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는 여기서도 극명한 서로의 포부를 비웃지 않고 나름대로 존중해주는 사이이니, 이 정도면 꽤 괜찮은 궁합이 아닐런지.


-


모처럼 남편과 휴일이 맞물린 오늘. 점심으로 가벼운 샌드위치를 시켜먹은 뒤 남편은 유튜브와 책을 번갈아보며 부동산 공부를 하고 있고, 나는 자연스럽게 거실 좌식 테이블에 앉아 타자를 두드리고 있다. 문득 우리의 이런 모습을 마주하고 나니 "아 뭐야 우리 진짜 개인플레이 쩌네? 근데 각자 터치 안 하고 열중하고 있어!" 하는 생각에 킥킥 웃음이 났다. 왜 결혼 전엔 꼭 부부가 코드가 맞아서 시종일관 무언갈 같이 해야 된다고 생각했을까. 한 공간에서 이렇게나 각자의 취미생활을 열심히 할 수도 있는 것을!


요즘 애청하는 곽정은의 유튜브에서 그녀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30대의 그녀는 남자를 볼 때, 세 가지를 봤단다. 1. 매력이 있는가. 2. 나를 좋아하는가. 3. 취향이 비슷한가. 나도 결혼 전 이 사람 저 사람과 연애를 하며 이 세 가지 항목을 기준으로 상대를 찾았던 것 같은데 늘 걸렸던 게 마지막 항목 3번이었다. '취향이 비슷한가'는 감수성 짙은 그때의 내게는 퍽 중요했던 부분으로, 대부분 영화나 음악 또는 옷 입는 취향 같은 비교적 얕은 문제들이 그에 속했다. 그리고 그게 잘 안 맞으면 내 짝이 아니라고 단언하곤 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그녀(곽정은)는 연애를 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가 취향이 아닌, '방향과 가치관의 일치'의 문제임을 발견했다고. 영화 취향이 다를 수도, 옷 입는 취향이 극과 극일 수도, 하다못해 그가 듣는 음악을 난 절대 못 듣겠다고 해도 그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란 거다. 나는 느릿한 영화를 좋아하고 그는 빠른 영화를 좋아해도 이렇게 서로 불만 없이 살 수 있는 이유는, 서로 추구하는 방향이랄지 결이랄지 그런 것들이 그녀의 말대로 비슷해서일지도 모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남편과 나는 '돈 없어도 행복해요'라는 마인드를 가지기엔 조금은 속물인 사람들. 이 농도가 비슷해, 적당히 금전적으로 누리고 소비하고 살자는 게 일치된 둘의 소망이다. 악착같이 아끼기보다는 쓸 땐 쓰고 여행도 다니고 맛난 것도 맘껏 먹는 게 우리 스타일. 게다가 둘 다 집순이 집돌이 체질에 피로를 느끼는 부분도 비슷하다는 거. 둘 다 정치인 A를 좋아하고 이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같다는 걸 방증한다. 인간적인 이야기에 둘 다 눈물을 흘릴 줄 알고, 동물을 좋아하며, 살아가는 데 제일 중요한 덕목이 '가족과 평화'라는 것도 비슷한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둘 다 개인주의 성향이라 서로에게 너무 깊게 간섭을 안 한다는 점도 같다! (어쩌면 이 점이 부부금슬에 제일 큰 기여를 한 것 같다.)


우리의 영화 스타일, 음악 플레이리스트, 옷 입는 스타일 등은 서로 참 다르지만은, 그럼에도 같이 잘 살아갈 수 있는 게 그런 이유였구나. 내내 미스테리한 부분이었는데, 곽정은 박사의 말을 들으며 궁금증이 해소된다.


-


결혼하면서는 남편이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가고 있다. 그는 내 제일가는 친구로서 나의 여러 친구들을 대체해 나와 많은 생각을 공유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부부가 왜 불꽃같은 사랑이 아니라 뭉근한 곰국 같은 사이어야 하는지 알 것 같다. 부부가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서로가 서로에게 지치지 않고 걸어가기 위해서는, 취향이 같아야 하는 게 아니라 그 다른 취향을 서로 이해할 줄 아는 사이어야 했던 거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부부도 많은 면이 다르지만 어쨌든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다. 길은 한 갈래지만 곳곳에는 다양한 볼거리들이 있어서, 나는 가다가 꽃을 발견해 한 동안 꽃을 쓰다듬으며 구경한다. 남편은 가다가 축구하는 소년들을 발견하고 그 축구경기를 구경한다. 서로가 시선을 빼앗긴 곳은 전혀 다르지만 충분한 각자의 시간을 보낸 뒤, 결국에 우리는 다시 손을 맞잡고 가던 길을 함께 걸어간다. 나는 아까 본 꽃 이야기를, 남편은 축구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의 색깔은 제법 다르지만 서로가 가고자 하는 길이 같은 방향이라면, 얼마든지 좋은 친구로 지낼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친구든, 부부든 마찬가지로.







해당 글은 에세이 <사연 없음>에 수록된 글입니다.

인스타그램 @woodu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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