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속의 독립된 인격체, 내면아이.
잡지를 보다가 알게 됐는데, 우리의 내면 안에는 '내면아이'라는 게 있다고 한다. 마음속에 존재하는 네 살 정도의 어린 아이다. 세상에. 네 살 아이의 육체와 정신은 얼마나 보드랍고 연약한가. 그런데 장성한 32세 여인인 내 몸속, 아니 마음속에 네 살배기 아이가 들어있다니 궁금증이 생겼다. 궁금할 땐 언제나 구글링을 이용한다.
내면아이란, 한 개인의 정신 속에서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처럼 존재하는 아이의 모습이다. <상처 받은 내면 아이 치유>라는 저서를 쓴 존 브래드쇼(J. Bradshaw)는 이렇게 말했다. 어린아이의 감정이 억압된 채 자라면, 상처 받은 그 아이는 성인이 된 후에도 계속해서 내면에 남아있게 된다고. 더불어, 무시당하고 상처 받은 과거의 내면아이는 후일 성인기 부적응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고. 즉, 상처 받은 내면아이를 치유해주지 않으면, 성인이 된 이후에도 수치심, 우울증, 편집증, 완벽주의 등의 성격장애부터 인간관계 문제까지 지속적인 문제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내 내면에도 존재할 내면아이에 대해 가늠해본다. 대인관계에서 일어나는 스트레스에 너무도 취약하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염려해 멀쩡한 일도 그르치고, 마땅히 주어진 행복감 앞에서도 이 행복이 과연 내 것이 맞나 의심하는, 중증 불안 환자인 내 마음의 내면아이도 어쩌면 상처를 받고 치유되지 않은 게 아닐까.
말해 뭐하랴. 실제로 나는 그리 평탄하지 않은 청소년기와 지뢰밭 같았던 20대를 보내왔고, 그 속에서 늘 나 스스로를 억압해왔다. 시련은 극복해야 하는 것이고, 불우한 환경을 탓하지 말지어고, 두렵고 힘든 일을 헤쳐나가지 못하면 어른스럽지 못한 거라며 나를 채찍질하며 살아오지 않았는가. 물론 내 내면에 어린아이가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내 속에 정말 내면아이가 있었다면 한 번이라도 제 편을 들어주길 바랬을 텐데. 그 생각을 하니 문득, 내가 참 나에게 무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엔 이런 정신·심리학적 사고가 만연하지 않았었다. 넘어져도 괜찮아, 넌 뭐든 할 수 있어, 지금 그대로도 멋져, 이런 톤의 메세지가 유행하던 시절도 아니었다. 하필 내가 가장 민감하던 10대 때부터 20대 중반까지는 그랬다. 부끄러움은 감추고, 의욕과 성취에 집중하라는 엄격한 태도가 더 만연한 시절이었다.
내가 잘난 사람이었다면 조금 덜 상처 받았을까. 객관적으로 항상 남들보다 뒤처져있고 사건사고도 많았던 내 삶을, 나는 부정하기 바빴었다. 어디 내놓기가 부끄러워서, 남들이 날 기피할까 봐, 악착같이 숨겼다. 그러자 그게 차차 내 성격이 되어버렸고. 사회적인 분위기도 있었겠지만, 특히 나 같은 유형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관대하질 못하다. 시선이 나 자신보다 타인에게 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준점도 항상 타인이고, 거기에 걸맞지 않은 스스로를 늘 어여삐 여기지 못하는 식이다. 한 마디로 자존감이 낮단 얘기다.
한편으론 지금에라도, 이런 정신·심리학적 메세지와 이론들이 화두가 되는 게 감사하기도 하다. 지금껏 날 억압하고 통제하기 바빴는데, 그것만이 어른이 되는 정답이 아니란 걸 깨닫게 해 주시니 사실 감지덕지할 일이다.
정신과에서 선생님이 처방해준 약을 먹으며 신체적 증상을 누르는 것 말고도, 내가 스스로 나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강구 중이었는데. 그러던 중 알게 된 이 내면아이라는 키워드가, 반갑게도 조금의 실마리를 주는 것 같다.
천천히 곱씹고 뜯어보고 싶어 졌다.
내 내면아이가 상처 받기 시작한 시점은 언제부터일까? 치료되지 않고 방치된 기간은? 지금이라도 내 내면에 있을 그 아이를 들여다봐주고 어르고 달랜다면, 그 아이가 더는 상심하지 않을까? 진심을 다해 치료해주고 싶다, 내 내면아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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