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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달콤한 음주 독서의 맛

술 마시며 책 읽는 '책 바'에 다녀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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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유 퀴즈 온 더 블록>은 내가 즐겨보는 프로그램 중 하나다. 각양각색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내용인지라, 볼 때마다 늘 새롭고 긍정적인 자극을 받고는 했었다. 어느 날은 평소보다 눈여겨보게 됐던 한 게스트가 있었는데.


그 날의 게스트는, 다니던 대기업을 갑자기 그만두고 자신만의 감성이 담긴 바(Bar)를 차린 한 젊은 청년이었다. 사연인 즉, 버스에서 스티브 잡스의 연설을 듣던 중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사는데 네 인생을 허비하지 말라"는 말에 그 날 바로 회사를 때려치웠다고. 그리고 평소 자신이 즐겨했던 음주 독서를 기반으로 한 바(Bar)를 오픈했다고 한다.


요즘 같은 시대에 고연봉 대기업을 때려치우고 불투명한 자영업이라니. 어찌 보면 무모해 보이는 선택일 수 있었다. 그런데 얘기를 계속 듣다 보니 그 무모함에는 믿을 구석이 있었다. 회사를 때려치우는 과감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이미 그 청년의 마음에는 자신만의 콘텐츠에 대한 믿음과 열정이 콘크리트 벽처럼 두껍게 존재했던 것이다. 플러스 대체 불가한 독창적인 감성까지도. 덤덤한 표정으로 얘기하고는 있지만 청년의 말투에서는, 뭐랄까 옹골참이 느껴졌다. 보는 내 마음에도 불이 지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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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마시며 책 읽는 곳, 책 바. (사진출처:핀터레스트)



연희동 소재에 위치한 그 청년 사장님의 바(Bar)는 아주 독특한 컨셉의 바였다. 이른바 책 읽는 바. 상호명도 <chaeg bar : 책 바>인 그곳은, 매우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책을 읽으면서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이었다. 책 속에 묘사된 위스키, 책의 느낌을 따라 사장이 직접 만든 칵테일 등. 책과 관련된 흥미로운 술이 그곳엔 가득했다. 그리고 당연히 그 술이 묘사되거나 제목이 된 책들로 공간은 가득 채워져 있었다.


며칠 전 친한 동생과 그곳을 다녀왔다.


술이 마시고 싶어서는 아니고 그곳이 너무나 궁금해서였다. 술이 당겼다면 나는 이 곳보다는 그냥 일반 펍을 갔을 것이다. 밖에서 먹는 술은 왠지 왁자지껄 트렌디한 팝을 들으며 즐기는 것에 익숙했으니까. 술에 취하면 책을 제대로 읽지 못할 것 같다는 의구심도 있었다. 책은 술보단 커피랑 더 어울리지 않는가? 그렇게 오롯이 '탐방'의 의미에서 다녀온 그곳에서, 나는 정말 정말 의외의 경험을 하고 오게 되는데.


평일 저녁 6시, 동생과 들어간 <책바>에는 다행히 아직 그리 손님이 많지 않았다. 덕분에 우리는 좀 명당스러운 구석 자리에 아늑하게 자리 잡을 수 있었다. TV에서 보던 그 사장님이 여유로운 자태로 메뉴판을 건넸는데, 일단 메뉴판에서 1차 감동이 전해졌다. 그야말로 하나하나가 다 의미 있고 사연 있는, 책과 관련된 술의 이름이 빼곡히 적힌 메뉴판이었다. 너무 다 특별하고 마셔보고 싶은 술이라서 뭘 마실지 정하는데만 대략 15분이 소요됐다. 마음 같아선 다 마셔보고 싶었지만 위스키의 가격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기에, 나와 동생은 딱 한 잔씩을 주문했다. 작은 안주 플레이트와 함께.


동생은 박상영 작가의 <대도시의 사랑법>이라는 소설의 이름을 딴 술, 나는 열렬히 사모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4월의 어느 해맑은 아침 100%의 여자아이를 만나는 일에 대하여>라는 소설의 이름을 딴 술을 주문했다. 살라미와 치즈와 올리브, 크래커로 이루어진 귀여운 안주 플레이트도, 술도 모두 마음에 들었다.


책은 마음대로 골라 읽을 수 있어서, 동생과 마음에 드는 책을 자리로 가져왔다. 술을 마시면서 이 책을 진지하게 읽어보겠다는 마음은 정말 전혀 없었는데, 여기서 2차 감동. 조용한 분위기, 낮게 깔리는 재즈, 어두운 조명 아래 책만을 밝혀주는 스탠드가 희한하게 책을 술술 읽히게 만들어주었다. 몸으로 알코올이 들어가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나 책이 술술 읽히는 경험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동생이 마시는 술의 이름과 같은 <대도시의 사랑법>을 읽었는데, 한 시간 반 만에 절반 가량을 읽어버렸다. 소설의 내용이 막힘없이 쭉쭉 내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동생도 한 시간 반 만에 <파타고니아>라는 책 한 권을 모조리 읽고는 내게 설명까지 해주었다.



책과 어울리는 건 커피라고만 생각했는데... (사진출처:핀터레스트)


아마도 둘 다 벙쪘던 것 같다. 이 의외의, 낯설지만 감격스러운 경험에 대해서. 술 마시면서 책을 읽는 일은 32년간 해본 적도 없고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술은 정신을 흩트리는 최고의 매개이고, 책은 정신을 붙잡는 최고의 매개이니, 어디 두 매개가 합쳐질 수 있다고 생각했겠는가. 그런데 막상 해보니 적당히 알딸딸하고 기분 좋은 상태에서 읽는 책도 무지 매력 있고, 무엇보다 집중이 꽤 잘 된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나에게 감동, 즉 3차 감동을 주었던 건 바로 그 장소와 크 컨셉을 기획하고 운영 중인 사람, 바로 사장님이었다. 나와 몇 살 차이 나지 않아 보이는 그 젊은 사장님이 이 모든 것들을 창조했다는 생각을 하니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나도 나름 창작욕에 불타는 사람이다 보니, 항상 나는 소비자 관점과 더불어 창작자의 관점에서 생각하게 된다. 이 독특한 발상을 현실로 옮기기까지 그가 들였을 정성에 대해, 이 공간에 대한 그의 큰 애정에 대해서 본의 아니게 감정이입을 하게 됐다.


하나하나 직접 읽어본 책들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술이 있다는 건, 일단 사장님의 독서량이 상당하다는 걸 방증한다. 그리고 그 책의 느낌을 살려 직접 만든 칵테일들은 얼마나 많은 연습 끝에 탄생했을지. 하나도 서툰 게 없이 꼼꼼하고 완벽에 가까웠던 그 날의 그 공간과 정서는, 청년 사장님의 열정과 노력을 보여주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 누군가에게 이토록 신선한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그가 존경스러웠다.


책꽂이에서 발견한 그의 저서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 일을 혼자 다 이루어내는 와중에 책까지 쓰다니, 보통 인물이 아닌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밖에서 칵테일을 흔들고 있는 사장님이 정말 커다랗게 보였다. 저 열정과 끈기와 정성과 꼿꼿함을 닮고 싶다... 닮고 싶다.


동생과 나는 그곳을 빠져나오며 너무 좋았다고 서로 발을 동동 구르면서, 길고 험난한 귀갓길에 올랐다. 분당에서 연희동은 정말 눈물 나게 멀었다. 조금만 가까웠더라면, 아니 강남만 됐더라도, 2주에 한 번은 올 수 있을 텐데.


<책 바>에서 느낀 여러 가지 설렘과 자극들을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 가슴에 깊이깊이 새기려 노력했다. 타인의 노력을 엿보는 일은 나에게 가장 큰 동기부여가 된다. 연희동은 정말 말 그대로 눈물 나도록 멀지만, 아마도 나는 그 먼길을 버스를 몇 번이고 갈아타서 다시금 갈 것 같다. 그 공간에서, 알코올을 곁들여 독서를 하는 그 신비로운 경험을 다시 하고 싶어서.


집에서 하면 안 되냐고? 음 일단 위스키가 없고, 그 공간은 감히 따라 할 수가 없다. 공간이 갖는 분위기가 얼마나 중요한데. 정녕 그곳에서 쭉쭉 읽히던 그 독서는 우리 집에서 코 후비며 하는 독서와는 또 다른 맛이었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이 집을 떠나 여행을 하고, 타인의 때가 묻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집에서 읽으면 더 편할 텐데도 먼 길을 찾아가 <책 바>에서 독서를 하는 것일 테다.


사장님은 알고 계실까, 자신의 공간에 다녀간 어떤 여자애가 완전히 그곳에 반해버려 이렇게 글까지 쓰고 있다는 걸? 그렇게 되기까지 들인 자신의 열정과 노력이 얼마나 대단하고 타인에게 귀감이 되는지를?


다음에 또 갈 생각을 하니 코가 벌렁거린다. 다음엔 신랑을 끌고 가야겠다. 도통 책을 못 읽는 그가 그곳에서는 한 권을 삽시간에 읽어버리길 바라며.





2021 일상의짧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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