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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수운 작가 우듬지 Mar 02. 2021

조금 비싼 다이어리로 퉁친 마음

그깟 다이어리로 미안함을 달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정녕?!

인스타그램 연재글 @woodumi



그는, 내가 스무 살이던 무렵 한 극단에서 알게 된 사람이었다. 


나는 작가를 꿈꾸기 전 청소년기 때, 잠시 영화산업 종사자를 꿈꾼 적이 있었다. 그만큼 영화를 좋아했고, 배우가 되거나 영화감독이 되거나 시나리오 작가가 되거나, 그 셋 중 아무것도 안되더라도 아무튼지 간에 영화 근처에서 숨 쉬겠다는 갈망이 짙던 때였다. 하지만 청소년의 몸으로 기똥찬 시나리오를 쓰거나 단편영화를 제작해 면접관들을 놀라게 할 만한 기적은 내게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나는 예술대에 진학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스무 살이 되던 무렵, 꿩이 아니면 닭이라도 잡자는 심산으로 베스트 프랜드와 함께 대전의 한 소극장에 기웃거리게 됐다.


아무것도 모르는 친구와 내게 맡겨진 일은, 연극이 있는 날 소극장에서 관객들의 입장을 돕는 일, 정산하는 일 등의 소일거리였다. 하지만 그것조차 영화산업 종사자가 되는 밑거름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스무 살은, 누가 뭐래도 모든 것들로부터 가능성이 무한한 나이었으니까.


하루는 극단에서 공동으로 주최하는 제법 큰 뮤지컬이 대전의 대형 홀에 유치된 적이 있었다. 지금껏 극단에 기웃거리며 본 적 없는 스케일이었다. 친구와 나는 들뜬 마음으로 스태프로 참가해 관객의 입장과 쉬는 시간, 그리고 퇴장을 도왔다. 나름의 복지라면, 스태프라는 명목으로 유명한 뮤지컬을 공짜로 몇 번이고 관람할 수 있었다는 것. 



아저씨지만 아저씨가 아니었던 K. (사진출처:핀터레스트)


당시 그 뮤지컬 관계자 중에는, 뮤지컬의 연출가였으며 연극배우이기도 했던 한 40세 남성분이 있었다. 뮤지컬 기간 동안 예술홀에 매일같이 출근하면서 그 연출가 분과 마주치는 일이 꽤 잦았었다. 그는 불혹의 나이었지만 키가 180쯤은 되었었고, 예술인답게 뭔가 아저씨이면서도 아저씨 같지 않은 세련된 이미지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그만큼 옷도 젊게 입고 다녔고, 술을 좋아하는지 얼굴은 시커멓고 새빨간 술톤이었지만 양 볼에 커다랗게 보조개가 패여 미소가 무지 매력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겠지만, 그 연출가는 단지 스무 살이고 영향력도 없는 스태프인 나에게 자주 말을 걸었다. 처음엔 너무나 멀고 큰 어른이었으므로 대하는 게 어려웠었는데, 갈수록 친근하게 구는 그에게 차차 나도 편안함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점점 '어른'이 아닌 '남자'로 내게 어필을 해온다는 거였다. 이를테면 자꾸만 내게 문자를 보내오고, 예쁘다고 칭찬하고, 뮤지컬이 공연되고 있는 어두운 홀에서 내 손을 잡고, 또 내 손을 잡고, 또 또 내 손을 잡았더랬다. 성실하고 지속적인 호의에 내 마음은 꽃봉오리 피듯 활짝 피어갔다.


그러나 그의 의중을 '나를 좋아한다'로 여기기 시작할 무렵에는 안타깝게도 뮤지컬이 막을 내렸다. 공적으로는 다시 그와 볼 일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연락을 해왔고, 그와 나는 대청댐에서 한 번, 보문산에서 한 번 데이트를 했다. 그 사이 그의 볼에 뽀뽀도 몇 번 한 것 같다. 어른의 세상에 사는 그에게, 유치하게 "우리 사귀는 거예요?"라고 물을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와 연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머지않아 정말 갑자기 그는 연락이 뚝 끊겼고, 심지어 8월의 내 생일이 있던 날조차 그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점점 불안한 생각은 현실이 되었고, 나는 처참한 심정으로 그가 떠났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비가 세차게 내리던 내 생일날, 답장이 오지 않는 곳에 문자를 보내며 서럽게 울었던 기억이 난다. 성질이 나서 동산에 올라가 마구 소리를 질렀던 기억도 난다. 내 인생 첫 실연이었다. 


그 불혹의 연출가가 수작을 부릴 때 넘어가는 게 아니었는데... 사랑이 아닐 줄 예상했어야 했는데...




시간이 지나, 나는 다니던 극단에서 친구와 함께 배역을 받아 작은 연극을 치르게 되었다. 눈썹이 매우 짙고 살짝 통통하던 스물네 살의 오빠가 남자 주인공, 나와 친구는 번갈아가며 여주인공을 했다. 시간이 약이라고 나는 그 연출가 K를 자연스레 잊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몇 달의 연습 뒤 소극장에서 드디어 연극을 올리던 날, 잊었던 그 연출가 놈이 다시 내 기억을 헤집고 나타났다.


"헤에엑! 어떡해 어떡해! K님 왔어!"


어여쁜 여주인공을 연기해야 했던 나는 그가 내 연기를 보러 왔다는 사실 탓에 심장이 그만 터져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스무 살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프로의식을 힘껏 발휘해 나는 실수 없이 연극을 무사히 치렀다. 몇 안 되는 관객에게 완벽해 보이고 싶다는 마음보다, 그 망할 연출가 놈 앞에서 실수하기 싫다는 마음이 더 컸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마음이 전부였을지도.


연극이 끝난 뒤, 그는 내가 지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을 줄 알았는지 부리나케 사라져 버렸지만, 우리 극단 사람들에게 선물을 남기고 갔다는 걸 알게 됐다. 별 것도 아니었다. 조금 큰 문구점에서 급하게 샀을 법한 다이어리였다. 당시 유행하던 어여쁜 일러스트가 수놓아져 있던. 그런데 포장을 뜯고 난 뒤 내 다이어리와 자신의 다이어리를 살펴본 친구가 내게 말했다.


"네 거가 훨씬 더 좋은 거야"


거기에 가격이 붙어있었는지까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내 것이 조금 더 두툼하고 뭔가 더 비싼 느낌이 났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게 뭐! 그래 봐야 다이어리 아닌가. 겨우 그깟 것에 의미부여를 하기는 싫었다. 비 내리던 내 생일날 생일 축하한다는 문자 한 통 보내지 않았던 그 매정함과, 좋아하는 척해놓고 해명도 없이 자취를 감춰버린 그 비겁함에 대한 미안함이, 고작 그 다이어리에 담겨있노라고 생각하기엔 어림 반푼 어치도 없지 않은가.




그래봐야 다이어리야. (사진출처:핀터레스트)


물론, 난 그 다이어리를 쓰지 않았다. 어디다 처박아두었었던가 내다 버렸던가 그랬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 염치없는 인간에게 나름의 복수를 하고 싶었달까.


시간이 더 지나, 내가 그의 나이 불혹을 현실적으로 헤아릴 수 있을 나이가 되고, 그때의 분노도 희석되고 나니,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당연히 그때 그는 나와 진심으로 잘해 볼 생각 따윈 없었겠구나. 그저 호기심이었겠구나. 어쨌거나 책임지지 못할 호기심을 이유로 내게 상처를 줬던 건 명백한 잘못이지만 말이다. 


어쩌면 더 시간이 지나 내가 그때 그 연출가와 같은 나이가 되고 나면, 그도 그저 '애'였다는 걸 실감하는 날이 올까 무섭기도 하다. 나이란 언제나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닌가. 먹고 보면 아직도 어른이 아닌 그런 것. 


지금쯤 그의 나이는 불혹도 아니고 지천명, 오십이 훌쩍 넘었겠다. 여전히 얼굴은 술톤 일지, 머리는 하얗게 샜을지, 아직도 그 매력적인 액면가와 특유의 다정함으로 어린 여자애들을 후리고 다니는지, 가끔씩 궁금하기는 하다. 


다정했지만 비겁했던 연출가 K.

나도 딱 그 다이어리만큼만 당신의 안녕을 바라겠다.







해당 글은 에세이 <사연 없음>에 수록된 글입니다.

인스타그램 @woodu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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