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하다가만난 귀여운 오빠에 대한 이야기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나는 집 근처의 한 작은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DSLR 카메라가 너무 갖고 싶었는데, 당시 내가 살 수 있는 수준의 입문용 카메라가 중고가로 알아보니 40만 원 정도였었다. 여름방학기간 동안 알바를 하면 딱 그 돈을 모을 수 있겠다 싶었다.
일은 편의점 알바가 하는 일과 흡사했다. 계산대에 서서 손님들이 갖고 오는 물건들을 계산해주고 봉지에 담아주거나, 물건을 대러 오는 업체 직원을 검수해주는 것이 주 업무였다. 야채나 고기 같은 건 사장님이 직접 농수산물시장에서 떼왔으나, 그 외에는 모두 업체 직원이 방문해서 물건을 직접 진열하고 회수하고 수금해가는 시스템이었다. 이 다양한 업체들의 물건들과 진열 장면을 지켜보는 건, 시장의 세계를 전혀 몰랐던 내게는 꽤나 재밌는 일이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진열대를 쓱 훑어보고 원하는 걸 자신의 의지로 고르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상은 그 진열대를 전략적으로 꾸며놓은 업체의 손길에 매우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에 불과했다. 이를테면 신제품 '무지개 과자'를 굉장히 잘 보이는 칸에 주기적으로 노출하면, 사람들은 다른 과자를 사러 왔다가도 덤으로 그것까지 사갈 가능성이 높았다. 때문에 업체들은 저마다 자기 회사의 상품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늘 열을 올리곤 했다.
유통기한이 상대적으로 긴 냉동식품이나 술 과자 등은 자주 오면 3일에 한 번 정도 방문했고, 그중 인기 없는 업체의 경우는 회전이 느려 2주에 한 번씩 오는 업체도 있었다. 반면 인기가 있으나 없으나 매일 와야 하는 업체들도 있었는데 그건 바로 '우유'였다. 잘 나가면 새 물건을 채워 넣어야 하니 매일 오고, 잘 안 나가면 유통기한 지난 물건을 회수하고 신선한 물건을 넣어야 해서 매일 오고. 아무튼 매일 와야 하는 것은 분명했다.
우유 업체도 여러 군데여서, 내 기억으로 우리 마트에는 한 세네 군데의 업체가 왔다 갔다 했던 것 같다. 나는 그중 빙그레 아저씨와 제일 친했지만, 자꾸만 눈이 가는 다른 우유업체가 있었다. 바로 서울우유. 다른 업체는 다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들이 하는데, 서울우유만 파릇파릇한 내 또래 남자 직원이었던 것이다.
맘에 들었던 이성의 첫인상은 늘 하이틴 로맨스의 남주 등장신처럼 느리고 선명하게 자리 잡는다. 펌을 해서 동글동글 브로콜리 같던 머리, 하얗고 깨끗한 피부, 짙은 눈썹, 두툼하고 새빨갛던 입술. 스물다섯이었던 그는 키가 작아서 그런가 전반적으로 더 귀여운 인상의 오빠였다.
나는 그 오빠가 너무 귀여웠던 탓에, 그가 계산대 바로 옆의 우유 매대에 우유를 채워 넣는 동안 온 안테나는 그를 향해 뻗어있곤 했다. 그가 우유를 다 넣은 다음 검수를 해달라며 검수 표를 내미는 순간에는 막 두근두근 대기도 했다. 최대한 아무 감정 없는 척 새침하게 "네, 다 맞네요." 하며 검수 표에 사인을 해주었지만, 막상 그가 가고 나면 검수 표에 적힌 그의 꼬불꼬불한 글씨마저 귀여워하며 혼자 키득키득했던 나날들이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부터 내게 비요뜨를 주기 시작했다. 처음엔 날짜가 임박해서 회수해가야 하는 제품을 주는 거였는데, 말을 트고 제법 대화다운 대화도 하기 시작한 무렵부터는 아예 새 제품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당시의 비요뜨 인기는 상당했다. 간편하게 톡 하고 꺾어 시리얼을 쏟아 먹는 그 신기방기한 요거트를 좋아하지 않는 이는 별로 없었다. 어쩔 땐 새로 나온 딸기우유나 커피우유도 주었다.
'아 이거 뭐야, 그린라이트인가? 사람 헷갈리게... '
남자들의 이런 호의에 데인 경험이 있으므로 지나친 기대는 하지 말아야 했지만, 그를 볼 때마다 입꼬리가 광대까지 치솟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마트에 온 그가 갑자기 내게 물건을 진열하기도 전에 "저 오늘이 마지막이에요"라고 말했다. 헐, 뭐라고? 사정을 들어보니 이제 자신이 맡은 거래처가 다른 데로 바뀌어, 내가 일하는 마트에는 다른 직원이 올 거라는 거였다. 유일하게 이 마트의 업체 직원들 중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 오빠를 다시는 못 본다니... 벌써부터 내 알바의 온 즐거움을 상실한 듯 서글퍼졌다.
그는 자신이 뱉은 말이 나를 얼마나 서운케 했는지는 알지도 못한 채 묵묵히 매대에 물건을 채우고 있었다. 그게 뭔진 몰라도 무슨 조치라도 취해야겠다 싶었다. 용기가 어디서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어느 드라마에서 훔쳐본 듯한 장면을 떠올려 그가 내민 검수 표에 재빠르게 내 전화번호를 적었다. 다른 메모까지 할 시간은 없었기에 정말로 딱 전화번호만을.
검수 표는 두 장으로 이루어져 있어 한 장은 내가 가지고 한 장은 업체가 가져가는 형식이었으며, 윗장에 글씨를 쓰면 밑에 장에는 먹지가 묻어 윗장과 똑같은 글씨가 쓰여지는 구조였다. 속기사보다 빠르게 적어낸 내 전화번호 010-9***-****.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는 내 전화번호가 적힌 줄도 모르고 "안녕히 계세요"하고는 그 검수 표를 가지고 사라졌다. 이제 이 마트에는 영원히 나타나지 않을 그 귀여운 서울우유 오빠. 부디 내 전략이 통해야 할 텐데...
그리고 그 날 저녁, 웬일로 하늘이 나를 친히 도왔는지 그에게 문자가 왔다.
「 전화번호가 적혀있어서요, 누구세요? 」
누구겠어 바보야! 어쩌면 그는 나일 걸 알면서도 지레 떠봤는지도 모른다. 나는 당당히 나라고 밝혔고, 그렇게 영영 못 볼 뻔했던 그 귀요미 오빠와의 연락이 시작됐다.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아니 미남.. 아니 귀염남을 얻는 것인가! 나는 바로 그의 전화번호를 내 폰에 저장했다. "서울우유 오빠♡"라고.
해당 글은 에세이 <사연 없음>에 수록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