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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수운 작가 우듬지 Mar 09. 2021

어쩐지 사귀자는 말을 안 하더라

나는 그의 여자친구가 아니었다.

인스타그램 연재글 @woodumi


고등학교 시절 짝사랑했던 J는 홀연히 호주로 떠났고, 성인이 된 내게 최초로 호감을 보인 연출가 K놈은 지독한 잠수를 탔었더랬다. 그리고 내게 드디어 최초의 풋풋한 사랑이 찾아왔다. 검수 표에 적어준 내 전화번호로 문자를 보내온, 서울우유 오빠!


그와는 연락을 하며 자연스레 만나게 됐다.


스물다섯 살이었던 그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누나가 한 명 있었다. 그 누나는 결혼하여 남편도 있었는데, 서울우유 오빠가 일하던 그 우유대리점이 바로 누나의 남편인 매형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오빠는 원래 서울 사람이라고 했다. 대학을 자퇴하고 별생각 없이 지내던 처남이 걱정됐는지, 매형이 그럴 바에 그냥 자신 밑에서 일을 하라고 했던 모양이다. 그는 그래서 대전으로 내려와 매형의 사업장에 딸린 작은 방에서 먹고 자며 우유 납품 일을 하고 있었다.


서울우유 오빠는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그에게서는 늘 좋은 향기가 났는데, 그건 향수나 섬유유연제 향이 아니었다. 사람의 몸에서 나는 향이었다. 심지어 담배를 폈는데 그 담배냄새마저도 역하지 않았다. 머리며 옷이며 심지어 입 맞추는 그 입에도 항상 은은한 정도의 담배냄새가 묻어있었는데, 그의 몸에서 나는 자체적인 향과 섞여 그냥 '향'처럼 느껴졌다. 흔히들 말하는 '담배 쩐내'라는 것도 어쩌면 관리하기 나름인 거였을까.


나는 그의 영업용 차량 라보(labo)에 같이 앉아 일을 따라다니기도 했고, 평범한 20대 커플의 데이트처럼 여러 데이트를 했다. 영화 보고, 밥 먹고, 술 먹고. 그러나 그와의 시간이 무르익을수록 나의 이 설레는 연애담을 듣던 친구들이 하나같이 묻는 말이 있었으니.


"그래서 그 오빠가 사귀자고 했어?"


당시엔 친구들이 왜 그리 '사귀자'라는 그 구두약속에 집착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오늘부터 1일' 따위의 유치한 말이 무슨 법적 효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대체 왜 그 어설픈 약속에 목숨들을 거는 걸까. 그냥 서로 좋아하면 그게 사귀는 거 아닌가?라고 나는 콧방귀를 뀌곤 했다.





좋아하면 사귀는 거 아니에요? (사진출처:핀터레스트)


그런데, 서울우유 오빠를 두 달 정도인가 만났을 무렵, 왠지 모르게 초조해져 왔다. 분명 나는 그를 좋아하고, 그도 나를 좋아하는 건 맞는데.. 그러니까 만나고 손도 잡고 뽀뽀도 하고 그러는 걸 텐데. 근데 그를 내 남자 친구라고 할 수 있을까? 내 폰 속에 저장된 명칭 「서울우유 오빠♡」를 「남자친구♡」로 바꾸고 싶은데, 그러려면 친구들 말대로 사귀자는 말을 들어야 하는 건가?


어느 날 그와 데이트를 마치고 그가 나를 집까지 배웅해주는 길에 슬그머니 물었다.


"오빠, 근데 우리 사귀는 거야?"


아, 내 입으로 뱉어놓고도 촌스럽기 그지없었다. 뭐 물어보나 마나 사귀는 사이라고 하겠지. 그런데 한참을 머뭇거리다 흘러나온 그의 대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실은... 오빠 여자가 있어"


머릿속에 쿠궁, 하고 천둥번개가 내려치는 것 같았다.


알고 보니 그에게는 나보다 더 이전에 만난 오랜 여자친구가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이건 양다리였던 것이다. 그는 매번 친누나라고 했지만, '여왕마마'라는 이름으로 걸려오던 그 전화의 대상이 알고 보니 여자친구였던 거다!


나 말고도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는 남자에게, 아니 나보다 더 오래전부터 좋아하고 있는 여자가 있다는 남자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일까. 스무 살의 혜안을 최대한 발휘해 그에게 나와는 그럼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그는, 제법 명쾌하게 대답했다. 나는 '너도' 좋다고. 분명 처음 들어보는 말인데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말 같다. 양다리를 하는 남자들이 어디 학원에서 배우기라도 하는 모양일까.




그는 나를 좋아한다. 그런데 나'만'이 아니라 분명 나'도' 좋댔다. 그 말은, 내 연락처에 그를 「남자친구♡」로 바꿀 수 없음을 의미했다. 친구들에게 이 오빠가 내 남자친구라고 할 수 없음을 의미했다. 원래부터 사귀었다던 그 언니가 모르게 숨어 만나야 함을 의미했고, 언제나 내가 첫 번째가 아닌 두 번째 순서임을 의미했다.


내가 양다리 대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몇 번 그를 더 만났지만, 그래서 결국엔 내가 더 좋아져 나에게 오기를 기대하기도 했지만, '너도 좋아해'라는 영 나를 불편하게 했다. 유일한 존재가 되고 싶은데 유일하지 않다는 기분은, 그가 나를 좋아해 주는 것과 상관없이 나를 몹시도 초라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제야 또래 친구들이 그렇게나 '사귀자는 말 아직 못 들었어?', '너네 사귀는 거 맞아?'라고 집요하게 물었던 이유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저 구두 약속일 뿐이지만 사귀자는 약속이 연인에게 필요한 이유는,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함이었구나. 이 연애의 다리가 내가 생각하는 돌다리가 맞는지 두들겨 확인해야 내가 물에 빠지지 않는 거였구나.


당연한 결과였겠지만 그와 나는 얼마 안 가 헤어졌다. 나를 정말 좋아한다면 그 언니를 정리하고 내게 오라고 했지만, 그는 그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다들 확인해보라고 아우성칠 때, 아니라고, 안전하다고 믿고 두들겨보지 않은 대가다. 나는 유일한 사람이고 싶었는데, 그는 내게 유일한 사랑을 줄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의 짧은 만남은 그렇게 막을 내려야만 했고.



아직도 서울우유 오빠와 관련된 사랑스러운 기억들이 어렴풋이 내 어딘가에 남아있다.

꾸불꾸불하고 귀여운 글씨체.

내게 비요뜨를 건네던 그의 손, 몸짓, 표정.

톡 하면 넘어질 것 같던 그의 귀여운 영업용 차량 라보.

살 냄새와 섞여 마치 향수처럼 풍기던 말보로 맨솔 냄새.


하지만 내 스무 살의 여름날부터 늦가을까지의 기억에 살고 있는 그 오빠가 내게 준 선물은 따로 있다. 바로 '사귀자'라는 말의 필요성이다. 그가 그 말의 무게를 최초로 가르쳐준 사람이었다. 그 오빠 덕에,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 와 무릎을 꿇으며 하는 고백까지는 아닐지언정, 적어도 서로가 연인관계임을 확인시켜주는 말을 반드시 들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래야 반쪽 자리 사랑 말고 유일한 사랑을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가 여전히 서울우유 납품 일을 하고 있을지 어쩔지 모르겠다. 그 대리점의 위치를 아직까지도 선명히 알고 있다만, 그와 헤어진 뒤로 그의 행방을 확인하는 일은 없었다.




다행히 내 남편은, 파스퇴르 우유를 제일 좋아한다.





'서울우유 오빠' 일화의 이전 이야기는 아래 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brunch.co.kr/@deumji/404




해당 글은 에세이 <사연 없음>에 수록된 글입니다.

인스타그램 @woodu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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