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콜 포비아는
오늘도 전화를 안 받습니다

세상엔 좋은사람도 많은데 내가 너무 움츠러들었을까


[정사각형] 07(1).jpg



콜 포비아 : 전화(call)와 공포증(phobia)의 합성어. 전화통화를 기피하는 현상으로 문자나 모바일 메신저, 이메일로 소통하는 것을 선호하는 것을 말한다.


나는 모르는 전화번호를 굉장히 무서워한다. 그게 02로 걸려오는 전화든, 070으로 오는 전화든, 단지 택배를 전달해주기 위해 걸려온 택배기사 아저씨의 개인전화번호든, 일단 모르는 전화는 다 안 받고 본다. 정 급하면 문자 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그래서 한 번이라도 교류가 있었던 번호는 대충으로라도 저장을 해서 누구의 전화인지 미리 알아보려는 습관도 있다. ‘#세탁소아저씨’, ‘#우리동네CJ택배아저씨’ 이런 식이다. (*저장할 때 이름 앞에 #을 붙이면 카톡에 안 뜬다네요*)


이렇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사건이 있었다. 사람에게 크게 데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이별 후 상식을 넘어서는 스토킹 피해로 전화번호를 두 번이나 바꾼 적 있는 데다, 친했다가 사이가 틀어진 동성의 지인 두 명이 받을 때까지 전화를 하며 괴롭히는 것을 경험한 적도 있었다. 차단을 하거나 안 받으면 다른 전화번호로 걸어오는 식이었고, 밤낮도 가리지 않았기 때문에, 한동안 나는 너무 괴로워서 이 인류에서 전화기가 없어지길 바랬다.


이제는 다 옛날 일이고, 그들도 집착을 버리고 다 본인들의 일상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더 이상 전화로 괴롭힘을 당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 경험들은 내게 치유되지 못할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모르는 번호는 위험하니까 일단 받지 말자는 어떤 강박관념을 심어준 것이다.


사실 택배의 경우는 전화를 안 받아도 기사님들이 집 앞에 잘 놓고 가셔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더구나 어디에 내 전화번호를 올려놓거나 노출한 적이 없기 때문에, 내게 모르는 번호로 전화를 걸 사람은 철저히 스팸 또는 과거에 나를 괴롭혔던 인간들 뿐이었다. 그래서 전화를 안 받아서 생기는 불편함 같은 건 모르고 살았다.



전화는 위험해 무서워. (사진출처 : 핀터레스트)


그런데 올해 초, 핸드폰을 정리하다가 연락처 어플을 통째로 지워버리면서 지인들의 모든 번호가 날아가 버리는 일이 생겼다. 다행히 카카오톡에는 그대로 친구 목록이 있었던 터라, 밀접한 지인들에게는 카톡으로 다시 연락처를 물어봐서 저장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디에서나 인간관계의 어려움은 그놈의 카테고리에서 발생하지. ‘이 사소한 이유로 연락을 해도 괜찮은 사이인가?’의 카테고리에서 걸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오래 연락하지 않고 지냈는데 대뜸 “안녕하세요 2년 만이네요, 그런데 제가 전화번호가 날아가서 그런데 전화번호 좀 주시겠어요?”라고 내 말만 하면 그것도 웃기고, 이 일을 빌미로 어색한 만남을 시도하거나 부담을 주자니 그것도 웃긴 노릇이었다. 그래서 꽤 많은 지인들을, 전화번호는 모르는데 카톡은 아는 그런 관계로 남겨둔 채로 시간이 흐르고 흘러 잊은 채 살고 있었는데...,


얼마 전 저녁을 먹고 집 앞 공원에서 운동 겸 걷고 있을 때였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경험상 택배 아저씨이거나 쓰잘 데 없는 광고전화라면 신호음이 세 번 정도 울리면 대부분 끊어지곤 했는데, 이상하게 조금 오랫동안 전화가 울렸다.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일까, 라는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그래도 간담이 먼저 서늘해졌다. 지인일까 싶어 통화버튼을 눌렀다가, 만에 하나 1%라도 그게 욕설이나 고함으로 시작하는 끔찍한 전화 괴롭힘이라면... 과거에도 그랬듯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얼어붙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지인의 전화를 생까는 싸가지가 되는 것보다, 그 악몽이 다시 재현되는 경험을 피하고 싶었다.


결국 나는 그 전화를 끝내 못 받았고, 상쾌하게 듣고 있던 브레이브걸스의 노래가 왠지 서늘하게 들려오길래 평소보다 빨리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걸려왔던 전화의 주인공은 그 이후 아무런 문자도 남기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 주가 지나, 신랑과 함께 친정집에 가서 주말을 보내고 있는데 또다시 모르는 번호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그런데 번호가 낯설었다. 공원을 걸을 때 전화를 걸어왔던 그 번호였다. (나는 숫자를 잘 기억한다) 가능성은 두 가지다. 정말로 내가 아는 지인인데 내가 번호를 날려먹은 탓에 누군지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다시 시작된 내 악연들의 스토킹 전화.


내가 너무 무서워하며 전화를 못 받자 남편이 전화를 대신 받아주었다. 남편은 전에 없이 퉁명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네 누구시죠? 어떻게 전화하셨는데요? 말씀해주시면 제가 전해드릴게요” 수화기 너머로 고함 같은 건 들리지 않는 걸 보니 이상한 전화는 아닌 듯했다. 그가 전화를 끊은 후 내게 그 내용을 전달해주었다.

“자기랑 같이 세종에서 같이 일했던 사람이라는데? 이름이 샐러리?”


맙소사, 박사님!


박사님은, 내가 결혼 전 세종에서 지낼 때 잠시 계약직으로 일했던 연구소의 샐러리(*가명) 박사님이셨다. 당시 작가로서의 진로와 먹고살아야 하는 문제 사이에서 엄청난 방황을 하며 손가락을 빨고 있던 나는, 좋은 기회로 박사님 밑에서 1년이 조금 안 되는 기간 동안 일을 하며 지낸 적 있었다. 사실 처음엔 생활비나 벌자는 주의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샐러리 박사님이 굉장히 보기 드문 넉넉하고 반듯한 인품의 소유자셨던 터라, 나중에는 내가 굉장히 질척거렸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박사님과의 인연은 굉장히 단기였지만, 박사님이 소개해주신 웨딩플래너님을 이어받아 결혼 준비를 하는 등 샐러리 박사님은 여러모로 나에게 너무 특별하고 좋은 기억만을 주신 감사한 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연결고리가 없는 인연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아직까지도 잘 모르고 어려워한다. 때때로 연락을 드려서 내가 아직도 감사해하고 있음을 표현할까 하다가도, 아니야 민폐야 귀찮아하실 거야, 하는 마음에 생겼던 마음도 접고는 하는 나였다. 그래서 그때 연락처가 날아갔을 때 ‘괜히 연락해서 귀찮게 하지 말자’ 리스트에 박사님을 넣었던 것이, 결국 박사님 전화를 두 번이나 피하는 실수로 이어지고 만 것이다.

남편에게 얘기를 듣자마자 나는 다시 전화를 걸었고, 너무나 죄송한 마음에 또 구구절절 평소보다 과잉된 톤으로 전화를 이어가게 되었다. 박사님은, 놀랍게도 내가 쓴 글들을 보셨으며 (이것도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지만), 심지어 내게 글을 잘 쓴다고 막 칭찬을 해주셨는데(이건 더 놀라웠다), 항상 우상처럼 섬기던 분께서 그런 이야기를 하시니 뭔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더 까마득해서 그만, 나는 “네네네”하고 웃기만 했다.


나를 잊으신 줄 알았던, 그래서 나도 잊혀드리려고 했던 어떤 관계의 특별함이 솔솔 상기가 되었다. 내 글을 보고 계시다는 말씀과 함께, 분에 넘치는 칭찬과 함께, 내게 소정의 일을 부탁하셨는데 그게 나는 더욱더 기뻤다. 받은 기억이 큰 분께 내가 뭔가 해드릴 수 있다는 게 내 마음의 빚을 갚는 것 같아서. 부탁에 대한 사례를 해주신다고 했으나 받을 수 없었다. 대신 박사님은 선물을 주겠다고 하셨다. 뭐든요 박사님 저는 감사해요 사실.




나쁜 사람들이 좋은 사람들을 덮었던 건 아닐까. (사진출처:핀터레스트)


전화를 끊고 나서 엄마와 남편과 밥을 먹으며, 나는 왠지 모를 뭉클함에 이런 드라마 대사 같은 말을 읊조렸다. “내 주위엔 정말 쓰레기도 많았지만, 정말 좋은 분들도 있었던 거 같아” 나의 콜 포비아 증상을 십분 이해하는 엄마와 신랑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때때로 너무 깊은 충격을 주었던 사람들이 내 기억 속에 똬리를 틀고, ‘인간은 원래 악하고 언제든 공격할지 모르니 거리를 둬. 너무 많이 너를 드러내지 마’하는 강박을 심어주고는 했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 길들여지니 나는 경계와 의심으로 똘똘 뭉쳐 인간관계도 점점 더 단출해져만 가는 중이었는데. 내 공포심이 너무 왜곡되게 자리 잡았다는 걸 일러주듯 따뜻한 사람들이 가끔 이렇게 하나씩 등장해 나를 일깨운다.


오래오래 빙하기를 겪고 있었는데 난데없는 봄이 온 것처럼, 나는 그 날 샐러리 박사님의 전화를 받고 잠시 녹는 기분이 들었다. 나쁜 기억에 움츠러드느라 내가 좋은 사람들과의 경험을 너무 축소하며 산 건 아닐까.. 내 인생에 참 좋은 사람들도 많았는데.


같은 의미로, 여전히 애틋하고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지만 또 나서서는 연락하지 않는 방식으로 멀어져 가고 있는 몇몇 지인들이 떠오른다. 청첩장도 주지 못했는데 내 결혼식을 축하해준 사람들, 모든 일정을 다 함께해주시며 끝까지 웃는 얼굴로 도와주셨던 내 천사 같은 웨딩플래너님. 그분들께 귀찮은 존재가 될지언정, 민폐가 될지언정, 그래도 한 번씩 안부인사를 건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2021 일상의짧은글

ⓒ글쓰는우두미 All rights reserved.

인스타그램 @woodumi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