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수상은 모두의 기쁨이었다.
지난 4월 25일. 아마 윤여정이라는 배우의 이름 세 글자를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소망했을 것이다. 세계의 가장 권위 있는 시상식 중 하나인 미국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우리나라의 여배우가 상을 거머쥐기를.
그야말로 국뽕이 차오르는 순간이었다. 우리나라 영화는 이제 해외 시상식에서도 당당히 어깨를 펼치는 저력을 뽐내는 클래스다! 그게 한때는 작품이나 감독 위주로 포커싱이 되어있었다면 이제는 연기력도 인정받는 시대가 온 것이다. 소속감과 애국심이 대체 뭔지, 내 일처럼 자랑스럽고 기쁘다.
영화채널 OCN에서 시상식 다음날인 26일, 밤늦게 중계방송을 해주길래 턱을 궤고 보았다. 이미 누가 받았는지는 다 알지만 그래도 장면 하나하나를 섬세히 기억하고 싶었으므로.
시상식의 후반부. 여우조연상 수상에 ‘여쭹-윤’하고 이름이 불리자, (250벌의 초고가 드레스를 거절하고 선택했다는) 검푸른 미니멀 드레스 차림의 작고 마른 75세의 여인이 단상에 오른다. 아름답기보다는 기품있고 당당한 그 모습이 멋있었다. 진즉이 영화 <미나리> 속에서는 윤여정의 손자 역이었던 데이비드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할머니는 진짜 할머니 같지가 않아요” 맞다. 배우 윤여정은 어떤 의미에서 진짜 할머니 같지가 않았다. 저게 어떻게 75세야!
그녀는 참 희한한 할머니다. 꼬부라지지도 않았고, 권위의식도 없고, 옷도 할머니처럼 안 입는 데다, 무엇보다 위트 있다. 위트가 있다는 건 젊다는 것이다. 단순히 가벼운 감성 같은 게 젊다는 게 아니라 진짜로 머리와 마음이 젊다는 것. 하고 싶은 말을 하되 적당한 유머와 섞어 기분 나쁘지 않게 말할 줄 아는 그녀의 재주는, 그녀가 그저 75세 노인의 프레임에 갇히지 않았다는 것을 가장 잘 방증하는 예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서양인들의 눈에도 이 점이 특별했는지 윤여정의 수상소감에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훗, 이런 멋쟁이 할머니가 우리나라 여배우란다 얘들아.
한편.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고 아름다웠던 이 날의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최악의 시상식’이라는 망언을 날렸다고. 그는 올해로 배우 윤여정보다 한 살 많은 76세 할아버지다. 도대체 이 분은 덕망을 어디로 쌓은 걸까. 인종차별이 난무하는 이 세상에, 누군가는 아시아인을 대표해 화합과 온기의 말을 전하는데, 누군가는 인종차별에 더 큰 기름을 붓는다. 나이를 먹는다고 모두 현자가 되는 것은 정말 아닌 모양이다. 모두가 장기적인 팬데믹으로 힘든 이 시절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모르긴 몰라도 트럼프 같은 할아버지보다는 윤여정 같은 할머니가 많아야 할 텐데 말이다.
<미나리>의 국제 수상이 실제 미나리라는 식물에 대한 인식에도 도움이 되었을지. 오늘 저녁 반찬은 뭘 먹나 제일 심오하게 고민하는 한국 주부인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난 이후 제법 미나리를 많이 사 먹었다. 맑은 지리 위에 얹으면 상큼한 허브가 되는 이 식물을, 그간 식당에서만 먹어보았지 우리 집 냉장고로 데리고 올 생각은 못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여기저기 잘 어울리고 맛도 있다. 국에도 넣어먹고 냉면에 올려보기도 하고, 전도 부쳐먹어 봤는데 그것도 맛있었다. 은근히 주재료 보조재료 무엇으로도 손색이 없는 식물인 데다 물만 있으면 어디에서도 잘 자란다는 이 만능 식물! 문득 나도 미나리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엄청나게 눈에 띄고 값진 존재는 못될지라도, 여기저기에 잘 어우러지고, 잘 자라고, 향기로운 그런 사람. 그런 삶.
하나 더. 얼마 전 윤여정의 새로운 광고를 보게 되었는데 너무 멋져서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그 전 모델이었던 미치게 이쁜 한예슬도 좋았지만,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옷 잘 입는 할머니인 윤여정을 광고모델로 캐스팅하다니! 지그재그, 그들의 혜안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보톡스로 붙들어야 하는 젊음 못지않게, 자유롭고 당당한 나이 듦을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꿈꾸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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