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당에 산 지 2년도 안되어 수원으로 가는 까닭은...
5월 21일 금요일 밤,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가 반지하 창문 덮개를 밟고 올라와 난간에 매달려 1.5층의 우리 집 부엌 창문을 들여다보게 된 사실을 알게 된 이후. 나로서는 엄청난 공포였던 이 사실이 경찰 눈에는 심드렁한 사건이라는 걸 알게 된 이후. 크나큰 통찰을 얻었다. 썅, 내 몸은 내가 지켜야 한다.
공동현관도 없고 CCTV도 없고, 입구에 가로등도 하나 없는 이 빌라와의 전세계약은 아직 1년이나 남아있었다. 입주 당시에는 우리 형편에 너무나 최적이고 내부도 깔끔했기에 손뼉 치며 계약한 집이었는데..., 안전이 담보되지 않는 공간이라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우리의 집 고르는 기준에 왜 ‘안전’은 없었던 걸까. 물론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지만.
그러나 이 난리통에도 딱히 이사를 가야겠다는 생각은 왜인지 못했었다. CCTV를 달아서 그놈의 얼굴을 선명히 찍으리라는 생각만을 했을 뿐. 물론 그런 영상을 확보한다고한들 경찰이 반응해줄지는 미지수였지만, 그래도 일단은 뭐라도 해야겠다싶어 바로 CCTV를 샀다.
우리가 산 CCTV는 원래 집안에 반려동물이 잘 있는지 보라고 만든 반려동물 전용 캠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우리 부부에게는 언제 또 우리 집 내부를 훔쳐볼지 모를 관음증 환자를 찍기 위한 더러운 용도가 되고 말았다. 예쁜 강아지를 보는 용도인 사람들이 자못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구매한 캠을 남편이 사부작 거리며 설치해준 끝에 핸드폰을 통해 실시간으로 영상을 확인할 수도 있었고, 무엇보다 요즘은 세상이 얼마나 좋은지 누군가 우리 집 창문 근처로 접근할 때마다 알림이 뜨는 기능도 있었다. 더 나아가 우리 집 창문에 누가 얼굴을 들이밀면 최루액이 터지는 그런 기능까지 탑재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무리한 상상도 살짝 해보았다. 그럼 최루액을 맞고 떼굴떼굴 구르는 그놈에게 달려가 내 손으로 잡을 텐데! 물론 그런 기능이 있는 캠은 없다. 그래도 캠을 설치하고 나니 그전보다는 안도감이 생기는 것 같았다.
우리가 자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창문 열심히 닫아놓기, 우리 집 부엌에 CCTV 설치하기가 끝. 이제 이 위험한 빌라를 소유하고 있는 집주인에게 뭔가를 요구해볼 참이었다. 경찰까지 다녀간 마당에 집주인의 입장에서도 뭔가 느끼는 바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집주인 아주머니께 공동현관을 설치해줄 수 있는지, 그리고 건물 입구에 CCTV를 달아줄 수 있는지 여쭈었다.
경찰에게 어떤 희망을 품었던 것처럼, 당연히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올 줄 알았다. 하지만 집주인 아주머니의 대답은, 상투적인 걱정 그리고 CCTV정도는 달아줄 수 있겠지만 공동현관은 무리라는 말씀. 말로는 택배 아저씨들도 오다녀야 하고 세입자들이 불편해한다는 거였는데, 세상에 어떤 세입자들이 안전한 공동현관을 두고, 택배 출입이 자유롭지만 위험한 개방현관을 원하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진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비용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냥 빠르게 마음을 접었다. 세입자인 우리가 요구는 해볼 수 있지만 강요할 수는 없는 문제였고, 누구나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그 공포의 크기를 알 수 없는 것이려니.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속절없이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이 관음증 환자는 부엌에 설치된 우리의 CCTV의 존재를 안 건지 뭔지, 나타나지 않았다. 뭐라도 잡아서 빼도 박도 못할 증거를 내 손에 쥐고 싶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그는 나타나지 않는 거였다. 정말로 일회성에 그친 행동이었을까? 아니다, 그렇다기엔 너무나 능숙하게 밟고 올라와 쑥 들여다보았잖아. 혹시나 싶어 남편한테 똑같이 해보라고 시켰는데, 남편은 휘청거리며 흉내조차 못 내더라.
도대체 뭘까. 어딘가에서 우리의 사부작 거리는 CCTV 설치 현장을 지켜본 걸까? 아님 경찰이 왔다간 걸 봤나? 그게 보일 정도로 아주 가까운 거리의 누군가일까? 뭐든 나타나야 얼굴을 알아보고 피하든 말든 하겠는데, 나타나지도 않으니... 그저 답답하고 불안감도 쉬이 걷어낼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던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결심한 듯 말했다.
“이사 가자”
전세계약이 아직 1년이나 남았고, 이사 갈 곳을 찾아다녀야 하는 그 수고로움까지도 끌어안고서, 그렇게 갑자기 우리의 이사가 결정되었다. 경찰에 이어 집주인마저 심드렁해하니 거기서 남편은 마음이 상한 것 같았다. 다행히도 우리가 이런 일을 겪은 게 내심 걸렸는지, 계약기간도 다 안 채우고 나가겠다는 우리를 집주인은 바로 수락해주었다. 그 정도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원래는 계약기간을 안 지키고 갑작스레 퇴거를 통보하는 것은 세입자의 반칙입니다)
신혼집이라고 공들여 꾸몄던 우리 집은 매물로 내놓은 지 이틀 만에 나갔다. ‘역시 내가 이쁘게 잘 꾸며놓은 덕이 크군’ 하는 뿌듯함과 함께 ‘그럼 우린 어디로 가지...’라는 걱정이 빠르게 밀려왔다.
내가 사는 이 곳 분당구의 한 작은 동네는, 그렇다 할 역세권도 아니고 뭣도 아니지만 그저 분당이라는 이유로 집값이 억 소리가 난다. 빌라가 위험해서 아파트로 이사 가기로 결심했지만, 이 동네의 지은 지 30년 된 써금써금한 아파트들은 전세가가 죄다 5-6억이었다. 그런 돈이 우리에게 있을 리 만무했다. 전세 1억 8천에 계약한 이 집도 이미 대출이 70%인 우리였으니.
네이버 부동산과 직방을 켜서 이 근방에 우리 예산(2억 이내)으로 갈 수 있는 매물을 검색했으나, 그 넓은 분당구 내에서 갈 수 있는 데가 5곳이 있을까 말까. 그것도 복층 오피스텔 아니면 또다시 빌라였다. 하는 수 없이 2억 2천까지 예산을 늘려 검색해보니 그제야 아파트 몇 개가 얼굴을 드러냈다.
마음이 급해 예산에 맞기만 하면 일단 남편과 함께 매물을 보러 갔다. 다 쓰러져가는 데다 구조도 평수도 인테리어도 뭐 하나 내키지 않는 허름한 매물을 두고, 부동산 아저씨는 ‘다시없을 파격적인 매물’이라 소개하며 어서 서두르셔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쇼호스트처럼 계속 긴장감을 유발하는 멘트에도 솔깃하지가 않을 정도로, 분당 내에는 (우리 예산안에) 정말 가고 싶은 집이 없었다.
이제 생각의 범주는 더욱 넓어지기 시작. 왜 꼭 우리가 분당에 살아야 하는가? 에 대한 질문을 시작으로 우리가 거주할 수 있는 곳을 넓혀나가기 시작했다. 분당 판교가 직장인 남편이 차를 끌고 1시간 내로 출퇴근이 가능한 지역은 용인, 수원, 광주 오포 정도가 있었다.
그렇게 레이더망을 넓혀 집을 알아보던 끝에, 우리는 수원에 나온 한 매물을 보게 되었고 한 걸음에 또 보러 달려갔다. 분당 어디메에서 본 좁아터진 아파트와 비슷한 금액대였고, 역시나 지은 지 30년이 되어가는 건물이긴 했지만, 평수나 구조가 상대적으로 너무나 괜찮은 곳이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정말 괜찮은 매물 앞에서 부동산 중개업자는 절대로 “서두르셔야 합니다” 따위의 말을 하지 않는다. 입주 시 올 인테리어를 보장하고, 무엇보다 우리 예산 안에 쏙 들어오는 그 아파트 매물을 두고서, 부동산 아주머니는 매우 여유로웠다. 똥줄이 타는 건 우리였으므로, 우리는 그 날 보러 가기로 한 다른 매물들을 모두 접고, 그날 그 아파트에 빠르게 가계약금을 넣었다. 다른 매물을 보러 가는 사이 누가 채가기라도 한다면... 그런 생각은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관음증 환자 덕에 어쩌다 수원까지 가게 되었다. 정말 영향력이 대단한 놈이다. 우리의 역마살에 참으로 대단한 기여를 했다. 대전에서 태어나 세종에서 살다가 분당으로 시집온 나의 역마살. 동해에서 살다가 안성에서 학교를 다니고 분당으로 취직한 남편의 역마살. 우리의 이 역마살은, 웬 변태 놈 하나로 인해 화룡점정을 이루어 이제는 수원으로 가게 됐으니. 거기에서는 우리가 좀 더 오래 정착할 수 있을까...?
너 하나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많은 수고를 했다는 걸 너는 아니? 우리는 더 안전한 곳으로 이사 가지만, 너는 얼마나 더 오랫동안 이곳을 배회하며 여성 세입자를 위협할까. 내가 이사 간 뒤 부디, 그곳에서 누군가가 성폭행을 당했거나 칼에 찔렸다는 소식만은 들려오지 않기를... 언젠가 꼬리가 길어진 네가 경찰에 잡혀 호되게 잘못을 깨닫기를, 바라고 또 바라.
이 이야기는 <여성이 안심되지 않는 길(1)>편과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여성이 안심되지 않는 길(1)>편 보러가기 (Cl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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