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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부지런한 구석은 한 가지 쯤 있어

게으르다는 자책으로부터 나를 구해주기

[정사각형] 01(1).jpg 인스타그램 연재글 @woodumi


청소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혹시나 오해를 할까 싶어 말하자면 청소를 안 좋아한다고 해서 아주 어질러놓고 산다는 뜻은 아니고, 정리정돈은 그럭저럭 잘하지만 먼지청소를 잘 안 하는 편이다. 청소기 돌리기, 물걸레로 선반 닦기 같은 류의 청소들. 가능하면 미루고 미루다, 도저히 눈앞에 굴러다니는 터럭들과 가구에 내려앉은 먼지가 거슬려 못 참겠을 때. 그때 한 번에 몰아서 청소를 한다. 로봇처럼 정해진 시간에 매일매일 청소를 하는 규칙성은 아무래도 몸에 배기 그른 것 같다.


그러나 반드시 부지런을 떠는 종목도 있다. 바로 설거지다. 거짓말 조금 보태, 결혼하고서 설거지를 하지 않고 잠든 날을 손에 꼽는다. 친구들을 불러 밤늦게까지 술판을 벌인 날에도, 설거지거리가 너무 많아 오늘 내로 다 할 엄두가 안 나는 날에도, 나는 개수대 앞에 서서 꿋꿋이 수세미를 들었다. 손에 꼽는 몇 개의 예외적인 날들은 몸이 아파 수세미 들 여력도 없는 날 뿐이었다.


설거지는 내가 가장 친애하는 청소다. 수세미에 주방세제를 짜고, 그릇에 세제칠을 하고, 뽀드득하게 물로 씻어서 건조대에 싹싹 엎어놓고 나면 늘 기분이 좋았다. 다른 청소는 싫어하면서도 설거지에만 유독 애정을 보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더니 바로 그 단순함 때문이 아닌가 싶다.


청소기를 돌리는 일은 쉽지만 가구의 바닥 부분이나 구석구석 해결되지 않는 부분들이 눈에 밟히기 마련이다. 화장실 청소는 변기에 들어갔다 나온 변기솔이 영 찜찜해서 하기가 싫다. (남편이 담당하고 있다) 빨래는 색깔을 구분해서 여러 차례 돌려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고, 물걸레 바닥청소는 (아직까지도 아이러니하지만) 분명 청소기를 돌렸음에도 먼지가 묻어나서 매번 짜증이 난다.


하지만 설거지는 이런 변수들로부터 자유로운 편이다. 얼마나 더럽던, 얼마나 기름기가 묻어있던, 그저 그 자리에 서서 열심히 수세미로 닦고 물로 씻어버리면 명쾌히 해결된다. 그래서 나는 10분짜리 화장실 청소보다 30분짜리 설거지를 선호한다. 어쩔 땐 설거지라는 행위가 너무 명쾌하고 시원해서, 세상 모든 일이 설거지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설거지가 제일 쉬웠어요 (사진출처:핀터레스트)



그러던 어느 날 SNS를 돌아다니는 짤에서 이런 문구를 보게 됐다.


세상에서 제일 부지런한 사람

3위 : 안 나가는 날에도 씻는 사람
2위 : 알람에 바로 일어나는 사람
1위 : 먹고 바로 설거지하는 사람


"정말? 이게 1위라고?"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살면서 1위라는 등수에 해당된 적이 없었는데, 나에겐 별 거 아닌 설거지로 내가 부지런한 사람 1위에 해당된다니 자못 기분이 좋았다. 맞춰놓은 알람에 번번이 못 일어나고, 운동을 하겠다고 선언을 해놓고 늘어지기 일쑤였던 몸인지라, 나는 나를 늘 자학하기 바빴었는데. 도대체 왜 이리 게으른 거냐며. 어찌 부지런한 구석이 하나도 없느냐며 스스로를 ‘답도 없는 게으름뱅이’라고 생각했었다.


허나 이는 나만의 일은 아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부지런한 점보다는 게으른 점을 부각하며 자책에 빠지는 것 같다. 100점 맞은 국어 시험지를 놓고도 50점 맞은 수학시험에 자괴하는 것과 비슷한 논리일까. 매일 같은 시간에 어김없이 일어나면서도 운동을 빼먹었다는 이유로 자신을 게으르다고 질타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대청소를 하면서도 어쩌다 하지 못한 세차 때문에 자신을 나무라는 주변인들을 많이 보았다. 매일매일 미루지 않고 설거지를 해왔으면서도 스스로 부지런하다고 느낀 적 없는 나와 영락없이 닮았다.


나를 의외의 부지런쟁이로 만들어준 그 짤을 본 이후, 나는 어쩐지 조금 자신감이 생겼다. 모든 면에서 부지런하지는 않지만 부지런한 구석도 분명히 있는 사람이란 걸 깨달은 것이다. 터럭들이 굴러다니는 바닥을 보며 스스로의 게으름에 한숨이 푹푹 나오는 날에도, 알람을 세 번이나 늦추고 헐레벌떡 눈을 떴을 때에도, 다이어트를 하겠다며 야채를 잔뜩 사놓고도 탄수화물로 과식을 한 날에도, 갑자기 적정선 이상의 자책감이 몰려올 때면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넌 한 번도 미루지 않고 설거지를 하는 사람이야. 자책하지 마"


그러고 나면 작고 사소한 게으름들이 치명적인 결함처럼 느껴지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자책 모드로 빠지는 것은 내 주특기지만.



우리 모두에게는 부지런한 구석이 있다구요 (사진출처:핀터레스트)


누구에게나 부지런한 구석은 있다. 자신이 게으름이라는 병마와 싸우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힐 땐, 자신의 일상을 한번 쭈욱 돌이켜보는 건 어떨까. 하나씩 짚어보면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부지런했던 일들이 생각보다 많이 발견된다. 일기를 쓰는 일, 매일 아침 영양제를 챙겨 먹는 일(나는 여태껏 습관을 들이지 못했다), 차가 늘 깨끗하게 유지되는 일, 하루에 한 번씩 부모님께 안부전화를 드리는 일 등등.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지런함들이 일상 곳곳에 숨어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연찮은 일로 이번에 나는 나의 새로운 부지런함을 하나 또 발견했다. 나는 핸드폰이든 디지털카메라든 찍은 사진들을 모두 날짜순으로 정리해서 외장하드에 넣어놓는 습관을 가졌는데, 어느 날 몇 년 전부터 찍은 사진들로 메모리가 꽉 찼다며 휴대폰 사진을 지우는 지인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메모리가 꽉 차서 사진을 지운 적이 없었다는 걸. (그 옛날 32GB를 쓸 때에 조차도 말이다) 그날도 하마터면 주특기인 자책 모드에 빠질뻔했다가, 집으로 돌아와 내 외장하드 속에 일렬종대로 정리된 사진 폴더를 보면서 괜스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스스로의 긍정적인 면을 새로이 발견할 때면 자존감이 봄날의 새싹처럼 봉긋하게 올라온다. 생활 속에 숨어있는 부지런함을 일으켜, 불필요한 자책 모드를 해제하는 일을 조금씩 늘려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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