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청하지만 부지런한 유형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세
남편은 종종 말한다. “난 정말 잔머리가 잘 돌아가는 것 같아”라고. 그는 자신을 일컬어, 잔머리가 빨라서 힘을 들이지 않고 일처리를 효율적으로 하는 유형이라고 한다. 왜 드라마에 보면 게으름을 피우면서도 타고난 머리로 벼락치기에 성공하는 캐릭터들이 있지 않은가. 설거지를 해준다기에 믿고 맡겨놓으면, 접시만 열심히 씻어놓고 음식물은 안 보이게 수채 구멍에 밀어 넣어두는 걸 보니, 내가 봐도 남편은 그런 유형이다.
이런 유형을 나타내는 요즘 말이 있다. 바로 “똑게”다. “똑게”는 ‘똑똑하고 게으른 사람’을 줄인 말이다. 이 말은 한 때 직장인들 사이에서 인터넷을 핫하게 달구며 돌아다니던 밈(meme)*에서 비롯됐다. 회사에서 리더와 부하직원과의 궁합을 맞춰보는 것으로도 유명한 이 밈은, 사람을 업무유형에 따라 네 가지로 나눈다. 똑게(똑똑하고 게으른), 똑부(똑똑하고 부지런한), 멍게(멍청하고 게으른), 멍부(멍청하고 부지런한).
*밈(meme) : SNS 등에서 유행하여 다양한 모습으로 복제되는 짤방 혹은 패러디물을 이르는 말이다.
짤막하게 줄여 부르는 이 경박한 어감 때문에 그저 우스개용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사실 이 밈은 한 역사적 인물로부터 기원한다. 프로이센의 최장수 참모총장으로, 주변 국가와의 전쟁에서 모두 이기며 독일 통일의 기초를 다진 ‘몰트케(Moltke, 1800~1891)' 원수다.
몰트케는 전쟁터에서 장교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기 위한 용도로 이 유형도를 만들었다. 유형은 지적능력(intelligence)과 주도성(initiative)이라는 기준을 토대로 네 가지로 구분했다. 이에 따르면 '똑게'인 내 남편은 지적능력은 높고 주도성은 다소 떨어지는 유형인데, 의외로 가장 좋은 리더상에 해당한다고 한다. 똑똑한데 부지런하기까지 해서 부하직원들의 일을 일일이 간섭하고 통제하는 리더보다는, 똑똑하지만 게으른 리더가 직원들에게 더 용이한 환경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세상에.
반면에 나는 남편과는 정반대 유형인 “멍부”에 속한다. '멍청하고 부지런한' 유형의 줄임말이다. 물론 지금까지 직장생활을 하면서 숱한 지각을 해오긴 했지만 나름 일처리에 있어서는 끈기 있고 부지런한 스타일이라고 자부해왔다. 이해력이 딸려서 효율적으로 일처리를 하지 못하는 구멍을 메꾸기 위한, 필연적인 전략이기도 했다. 빠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일에는 몇 시간이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부지런함이라도 보여야 상사가 나를 거둬주지 않겠는가.
이런 나를, 이 유형의 창시자인 몰트케는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잘못된 판단과 부지런함으로 조직을 위험에 빠뜨리기 때문에 반드시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이 말을 읽고 웃퍼서(웃기고 슬퍼서) 한참을 웃었다. 멍청한 것도 서러운데 반드시 정리를 해야 하는 대상이라니. 아니, 멍청하고 게으른 사람보다 멍청하고 부지런한 사람이 더 쓸모가 없다고?!
비록 몰트케는 멍부를 가장 쓸모없는 유형의 인재로 여겼지만,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대표 멍부로서 목놓아 주장컨대, 멍부도 분명히 쓸모 있는 지점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단순한 승패의 결과값으로 좌우되는 전쟁터에서는 멍부 장교가 쓸모없는 인재 일지 모르나, 전쟁의 시대는 저문 지 오래거늘. '존버(존나 버티기)'가 하나의 생존능력이 되는 이곳에는 예상외로 선전 중인 멍부들이 많다는 거.
내가 아는 성공적인 멍부 캐릭터를 꼽자면, 그건 바로 MC 유재석이다. 감히 유느님에게 '멍청한'이라는 키워드를 갖다붙이다니 무엄하다 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는 나름의 긍정적인 근거가 있다. 나는 무한도전이 있기 전부터 유재석의 예능프로그램을 보고 자라온 90년생이다. 지금의 무도와 유느님이 창조되기도 한참 전, 유재석의 공식 직업명은 '공채 개그맨'이었다.
하지만 당시 나는 개그맨이라는 그를 한 번도 재밌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가 출연하던 많은 예능에는 더 웃긴 사람들이 많았다. 김용만, 강호동, 이혁재, 신정환 등등. 모두 입만 열면 빵빵 터지는 개그맨들이었던 반면 당시의 유재석은 배꼽 빠지는 웃음을 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심지어 <느낌표 :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유재석과 함께한 김용만의 입담이 상대적으로 너무 좋아서, 거의 김용만 혼자 프로그램을 이끌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던 그가 지금의 유느님, 부동의 1위 MC가 되기까지, 유재석에게는 배꼽 빠지게 하는 유머는 없을지언정 타고난 부지런함이 있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는 공백 없이 늘 티브이 속에 있는 사람이었다. 성실함을 무장한 채 매년 쉬지 않고 꼬박꼬박 프로그램을 이어나갔다. 그러다 무한도전이 생겼고, 초창기에 존폐위기에 처할 뻔한 무한도전을 최고의 장수 예능프로그램으로 이끈 일등공신도, 묵직한 부지런함을 보여준 유재석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가 '웃긴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금의 유느님을 신봉하는 것도 그가 웃겨서는 아니다. 언제나 성실하고 바르게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모습을 좋아해서다. 그리고 웃기진 못해도 성실하고 바른 그 매력이 오히려 프로그램 출연자들을 독려하고 경청하는 MC의 좋은 자질로 승화될 수 있기도 했다. 빵빵 터지는 개그 신동이었다가도 어느새 하나둘씩 종적을 감춰버리는 반짝 개그맨들을 볼 때면, 성실함이야말로 얼마나 큰 무기인가를 새삼 실감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다각적이고 다채로운 곳이다. 상대 진영을 얼마나 빠르게 압살 하는 가가 전부인 전쟁터와는 생존 방식이 사뭇 다르다. 그러니 세상이 필요로 하는 인재 역시 다양할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던 '덕후'가 이제는 전문적 지식을 갖춘 사람으로 환대받듯이, 과거에는 제거대상이었다던 멍부 유형들도 얼마든지 자신만의 매력을 떨칠 수 있는 세상이 아닐까.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도 멍부는 꽤 쏠쏠한 캐릭터다. 지능만큼이나 중요한 자질이 묵묵히 앉아 매일같이 글을 쓰는 그 부지런함일 테니. 어차피 이번 생에서는 지능을 가지지 못했으니, 누가 뭐래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글을 쓰는 부지런함으로라도 차곡차곡 데이터를 쌓아가야겠다며, 나는 오늘도 다짐한다.
8월 1일. 멍부 글쟁이에게 좋은 기회가 또 하나 찾아왔다. 컨셉진 스쿨의 <50일 글쓰기 프로젝트>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50일 동안 빠지지 않고 글을 쓰고 인증하면 출판 기회를 얻을 수 있는 프로젝트다. 물론 쓴다고 해서 모두가 출판 기회를 얻는 건 아니지만, 결과 여부에 상관없이 나는 나를 단련시키는 기회로 이 프로젝트를 신청했다.
50일 동안 빠지지 않고 글을 쓰는 데에는 모름지기 '부지런함'이 첫 번째로 요구된다. 나는 이곳에서 치열한 부지런함 들을 목격하고 있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주말이어도 하루 종일 약속이 있어도, 50일 글쓰기에 면제 사유는 없다. 하지만 이 빡빡한 기준에도 불구하고 신청서를 내민 사람들이 제법 된다. 지능이 높은 사람들만큼이나 나를 고무시키는 사람들은, 이런 부지런한 사람들이다. 나도 내 필살기인 멍부력(力)을 힘껏 발산해야 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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