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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할 필요 없는 일에 사과하지 않기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 되려다간 내가 골병나겠어...

[정사각형] 03(1).jpg 인스타그램 연재글 @woodumi


한 때 나는 착한 사람 콤플렉스가 있었다. 만인에게 좋은 사람, 어진 사람이고자 했다. 기분이 나빠도 안 나쁜 척, 부담스러워도 기꺼이 달가운 척, 언제나 눈을 반달 모양으로 만들며 "괜찮아요"를 입에 달고 살았다. 둥글둥글하게 사는 게 좋다지만, 적을 만들지 않는 게 현명한 거라지만, 결과는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내가 둥글둥글하게 굴어도 소위 '지랄'을 하는 사람은 어떻게든 생겼다.


그런 일은 대면 세계보다 인터넷 세계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원래 그런 건지, 얼굴을 보지 않으니 용감해지는 건진 몰라도, 익명에 기대어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제법 열심히 SNS로 글을 쓰다 보니 나의 소박한 공간에도 그런 사람들이 조금씩 찾아왔다. '미친년', '뒈져라' 같은 악성 댓글을 경험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꼭 육두문자가 들어가야지만 사람의 마음을 해치는 건 아니더라. 욕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꼬장꼬장하게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들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힌다.


초반에는 나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시비의 댓글을 거는 사람들에게 항상 사과를 했다.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면 죄송하다고, 기분 나쁘라고 쓴 글은 아니었다고, 오해를 하게 해서 죄송하다고. 그러나 대부분 내 글에 필요 이상의 화를 내며 댓글을 다는 사람들은, 내가 쓴 글들의 취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혹은 아주 단편적인 문장 하나를 보고는 내게 달려드는 경우였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몇 년 전, 지금의 남편과 일본 여행을 다녀온 일화에 대해서 브런치에 글을 게재한 적이 있었는데, 다짜고짜 어떤 사람이 "이런 매국노년"이라는 댓글을 단 것이다. 그 당시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향해 수출규제령을 내리면서 한일관계가 최악을 치달을 때였다. 유니클로가 속속들이 폐점을 하고, 아사히 같은 인기 일본 맥주가 편의점 냉장고에서 빠르게 사라지던 때.


물론 나도 한국인으로서 일본의 외교정책에 반감이 들 때가 있다. 졸속적인 위안부 합의 문제라던지, 독도를 계속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일이라던지. 일본이 이기적이고 비겁한 태도를 보일 때면, 32년간 한국인으로 살아온 나 또한 당연히 화가 난다. 하지만 그런 파동이 있기도 한참 전에 다녀온 오사카 여행 이야기에, 그것도 외교문제와 하등 상관도 없이 써 내려간 여행 감상문에, 왜 매국노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 류의 댓글은 잊을만하면 달렸다. 나는 때때로 맛집을 소개하는 글을 쓰기도 하는데, 모 식당에서 먹은 파스타가 맛있었다고 소개한 글에 "아니 그 집은 파스타 맛집이 아니에요. 폭립 맛집인데요? 뭘 좀 잘 알고 쓰세요"하고 달린 댓글이라던가. 줄거리보다는 주관적인 감상을 주로 적는 내 스타일의 영화 리뷰에는 "영화 끝까지 안 봤어요? A가 죽는 얘긴 왜 안 써요? 이건 완전 틀린 글이잖아요."라고 단 댓글이라던가. 내 상식으로는 근거가 부족한 비난 댓글들이 종종 나를 괴롭혀왔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착한 사람 콤플렉스를 배낭처럼 짊어지고 다녔던 나였기에, 나는 내가 뭘 잘못했는지는 몰라도 항상 그런 사람들에게 사과를 했다. 굳이 사과할 지점을 찾자면 '그 사람 눈에 내 글이 띈 점' 정도였겠지만 그래도 일단 나는 착한 사람이고 싶었다. 그래서 맘에도 없이 "오해하셨다면 정말 죄송합니다"하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하지만 몰이해와 몰배려를 동반한 댓글과 의미 없는 사과가 끊임없이 반복이 되니, 마음에 검은 얼룩이 들어찼다. 이런 사람들에게조차 착한 사람 노릇하는 게 정말 맞는 걸까? 내가 사과한다고 이 사람이 알아줄까? 100개의 좋은 댓글들 속에 있는 겨우 한두 개의 비난댓글로 내가 너무 힘들어할 때면, 남편은 솔로몬처럼 이렇게 이야기했다.


"자기야,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야. 그냥 무시해. 앞으로 이런 일은 계속 있을 텐데 평생 신경 쓸 거야?"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 되려다간 내가 골병나겠어... (사진출처:핀터레스트)


멀찌감치 떨어져서 이런 나를 바라보는 남편은 놀라울 정도로 맥락을 잡는다. 어쩌다 한두 개의 안 좋은 댓글에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쏟는 나에게, 객관적인 상황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매일 피파(FIFA) 게임만 하는 줄 알았는데, 이럴 땐 정말 솔로몬이 아닐 수 없다.


그 이후로 착한 사람 콤플렉스를 서서히 내려놓게 된 나는, 근거 없이 비난하는 댓글이 달릴 때 어떻게 했느냐. 남편 말대로 무시했다. 사과하지 않았다. 내 글을 정확히 이해하고 지지해주는 사람들의 댓글에만 성실히 답을 했다. 아무리 날카로워도 배려를 갖춘 비평에는 수긍했지만, 앞뒤 없는 비난은 꾹 눌러 삭제했다. 정말로 사과해야 할 일에만 사과를 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그랬더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이슬아'는 <일간 이슬아>라는 일일 연재를 하면서 못생겼다는 내용의 악성메일을 수없이 받았다고 한다. 미스코리아도 아니고 글을 쓰는 작가에게 왜 얼굴 품평을 해대는지, 면전에선 못할 말을 왜 인터넷으론 그리 싸질러대는지, 나 같았으면 속상해서 울고불고 난리였을지도 모르겠다.


처음엔 이슬아도 나처럼 죄송하다는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치사한 인신공격에도 죄송해야 했을 그녀가 안쓰러웠다. 하지만 그녀는 어느 순간 'unappologetic(사과를 하지 않는)'의 자세를 터득했다. 말 그대로, 사과할 필요가 없는 일에는 자신을 낮추며 사과하지 않는 태도를 말이다. 그랬더니 결국 그녀에게는 이슬아의 글 자체만을 순수하게 좋아해 주는 코어 독자들만이 남았다고 했다.



나를 위해서, 필요한 곳에만 사과하기. (사진출처:핀터레스트)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피상적인 것들에 꽂혀 타인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쌍욕이 아니니까 괜찮겠지, 하며 그저 쌍시옷만 없을 뿐인 악플을 다는 사람들도 허다하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내 인생에서 완전히 제거하는 법은 아마도 없는 것 같다. 아직까진 악플을 제거하는 인공지능도 문맥까지는 파악하지는 못하는 것 같고 말이다. 그러니 내가 편해지려면 그들의 비난에서 나를 분리하는 태도를 가져야 할 따름이다.


나는 보통의 한국인처럼 일본에 이중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 뉴스나 역사이야기만 들으면 그들이 죽을 만큼 밉지만, 오사카의 수많은 먹거리와, 지브리 스튜디오의 뛰어난 감수성, 유키구라모토의 청아한 피아노 선율 같은 것은 부디 해수면 아래로 가라앉지 않길 바라는 그런 사람이다. 그런 나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매국노라 칭하는 사람에게는 나는 이제 사과하지 않는다. 영화는 영원히 내 식대로 리뷰할 것이고, 제 아무리 폭립 맛집이어도 내 입에 파스타가 맛있으면 맛있다고 쓸 것이다. 만인에게 좋은 사람 말고, 나에게 친절한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으니까.


지금은 그 '매국노년' 일화를 떠올리면 픽픽 웃음부터 난다. 그 사람, 왠지 지금쯤 유니클로에 가서 잘만 옷을 사입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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